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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인터뷰·칼럼

기고- 정연수 탄전문화연구소장 9 탄광노동자들의 축제 광공제를 개최하다

태백의 산업전사위령탑은 한국을 대표하는 상징성을 지녔었는데, 언젠가부터 탄광 지역마다 각각의 산업전사 위령비를 건립하고 추모행사를 진행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영월군은 2009년 강원도 탄광문화촌에 산업전사 위령탑을 세우고 10월에 열리는 탄광촌문화제 때 위령제를 지낸다.

 

영월의 위령탑에는 264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영월군과 동강시스타 리조트 임직원 등이 새해 첫날 산업전사 위령탑을 찾아 참배하고 헌화하는 예를 갖추기도 한다. 정선군은 2018년 12월 26일 사북뿌리공원에 석탄산업전사 기념비를 세우고 제막식을 가졌다. 충남 보령시는 1995년 보령석탄박물관을 개관하면서 ‘석탄산업희생자 위령탑’을 세웠다. 보령의 석탄산업희생자 위령탑에는 희생자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다.

 

경북 문경시는 1999년 문경석탄박물관을 개관하면서 ‘석탄산업 희생전사 추모 조형물’을 세웠다. 전남 화순군은 2006년 광부상을 넣은 위령탑과 ‘석탄산업 종사 재해자 추모공원’을 조성하고 화순광업소 재해자 216명과 진폐재해자 604명의 순직 영령을 위로하고 있다. 이처럼 태백시 외에도 정선, 영월, 문경, 보령 등을 비롯해 주요 탄광도시에서 산업전사를 추모하는 작은 공간이 마련돼 있다.

 

2017년에는 정선과 도계지역에서 산업전사위령탑 건립 움직임이 있을 때, 태백의 ‘폐광지역 순직 산업전사 유가족협의회’가 반대 의견을 내면서 언론을 통해 공론이 이뤄지기도 했다. 이러한 점은 태백의 산업전사 위령탑이 추모공간의 대표적 상징성을 확보하지 못한 실상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고, 다른 탄광도시에서 탄광문화를 지키려는 새로운 기획이 시도된다는 긍정적인 측면이기도 하다. 또 다른 관점에서는 ‘광도 태백’에서 위령탑을 세워놓고도 순직광부를 제대로 예우하지 못한 처사에 대한 반발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태백의 산업전사 위령제는 한동안은 강원도 주관으로 강원도지사가 직접 참여하는 등 관심을 가지다가 어느 날부터 태백시 자체의 제례의식으로 격하되었다. 태백제 행사 속에 산업전사 위령제를 제외하면 광부나 그 가족을 기리는 프로그램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태백시가 산업전사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는지를 유추하게 한다. ‘광도 태백’을 내세우면서 시로 승격한 태백시가 탄광문화를 외면하면서 산업전사에 대한 의미가 약화했다. 이번에 추진하는 석탄산업전사 성역화 사업은 ‘광도 태백’의 정체성을 찾는 길이자, 태백시를 만들어준 광부들의 노고에 대한 보상의 과정이어야 한다.

 

1989년 시행한 석탄합리화는 오염의 주범이 되는 화석연료인 석탄생산을 줄이고, 국비를 보조하여 운영하는 적자 기업인 탄광의 문을 닫는 경제성을 중시하는 정책이었다.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추진한 합리화 시행은 국가가 ‘산업전사 찬양’ 광부들을 위한 행사나 사택촌에서 ‘산업전사 찬양’이라는 문구를 사용하곤 했다.

 

폐광지역의 회생을 위해서 강원랜드 카지노가 세워졌다지만, 폐기 처분된 광부의 삶과는 전혀 관련 없는 사업일 뿐이었다. 산업전사 성역화 사업은 국가 산업 주도로 산업전사가 되었다가 폐기처분 된 광부의 상처를 위로하는 일이어야 한다. 7개 탄광도시를 아우르고, 한국 석탄산업 100년을 포괄할 수 있어야 한다. 순직자와 재해순직자만이 아니라 한국의 모든 산업전사에 대한 삶을 예우하고 기리는 형태로 추진할 때 태백은 탄광촌의 대표성과 상징성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3) 광부들의 고향 태백 : 광부 인력 양성

태백은 탄광 기술 인력 양성의 산실이었다. 대한석탄공사는 1957년에 장성기술훈련소를 설치하여 인력 양성에 나섰다. 1961년 함백으로 잠시 이전하긴 했으나 1962년에 다시 태백으로 돌아왔다. 또 1972년 영월로 훈련소를 이전하기도 했으나, 1984년 석공 태백훈련원을 건립하면서 다시 장성으로 돌아왔다. 태백훈련원에서 대한석탄공사 소속 광부 뿐만 아니라, 1985년부터 1991년까지 민영탄광 신규 채용자 4,200명을 교육하였으니 태백은 광부들의 고향인 셈이다. 또 1975년부터 파독광부의 탄광 기초 훈련이 장성에서 이뤄졌으니, 파독광부의 고향이기도 하다.

 

파독광부는 독일에서 노동한 광부이면서도 외화벌이를 통해 한국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게다가 파독광부는 태백과 도계지역에서 탄광 기초교육을 받고 독일로 나갔다. 그런 점에서 태백과 도계는 파독광부의 고향과도 같다. 파독광부의 흔적을 기리는 구술생애사 작업, 사진 확보, 각종 유산 자료 확보 등을 태백에서 추진해야 한다. 태백시 철암동에는 파독광부를 기리는 작은 기념관이 있는데, 이를 석탄산업전사 성역화 공간 안에다 박물관 수준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

 

4) 강원도 탄광노동자의 축제 ‘광공제’를 개최하던 태백

태백시가 탄광촌의 구심점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은 지역 축제인 ‘광공제(鑛工祭)’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60∼1970년대에 열리던 ‘광공제’는 탄광을 중심으로 마련한 삼척·태백지역의 축제였다.

 

광업을 공업보다 앞세운 축제의 명칭에서 탄광을 중시하는 삼척·태백지역의 실상을 짐작할 수 있다. 광공제는 광공업의 발전을 통한 지역발전과 광공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사기를 북돋우려고 마련된 행사이다. 전야제의 중심행사인 광공기원제라든가, 본 행사인 모범 광공업체 노동자 표창 등의 행사는 축제의 성격을 분명히 보여준다.

 

1회 광공제는 2일간 열렸으나, 2회 광공제(1969. 8. 1~ 3)부터 3일간 개최로 규모가 커지는데, 축제 기간에는 70여 기업체의 공장기(工場旗)가 행사장에 게양되어 광공제 분위기를 돋웠다. 3회 광공제(1970)에는 관내 30여 개의 광업소에서 버스를 대절하여 탄광노동자들을 참여하는 축제로 발전했다.

 

5회 광공제(1973. 7. 1)는 석탄산업 발전으로 황지리에서 황지읍으로 승격한 기념으로 황지에서 개최되었다. 순직광부위령제를 비롯하여 17개 종목이 진행되었다. 7회 광공제(1978. 10. 17~18)부터 황지읍으로 개최지를 옮겼으며, 행사명도 ‘태백광공제’로 개명하였다. 태백광공제를 주관한 태백광산제 추진위원회는 광공업 중심에서 탄광업 중심으로 전환한다. 행사 참가범위도 관내 업체뿐만 아니라 정선·영월 등 인근 탄광지역으로 확대하여 강원도 탄광노동자의 축제로 발전시켰다

 

태백광공제는 탄광에서 순직한 광부의 영령을 기리는 산업전사위령제를 가장 먼저 올리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어서 광부들의 동발 조립 경기, 동발 시공 시범경기, 연탄 이고 달리기, 동발 지고 달리기대회, 수타식 연탄 만들기, 광업소 대항 줄다리기 등의 탄광촌 특색이 담긴 행사로 가득했다. 태백광공제는 1981년 태백시 승격 이후 명칭이 사라진다. 태백시는 ‘태백제’로 이름을 바꿨으며, 탄광촌 특색을 지닌 프로그램도 없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해마다 10월에 열리는 태백제 행사에서 ‘동발 조립 경기’가 있었다. 각 광업소에서 선발된 기능이 뛰어난 광부들이 동발 조립을 선보이며 경연을 벌였으며, 심사 때는 안전·신속·정확도를 측정했다. 그러다가 1989년 석탄산업합리화 이후 동발을 세우는 경기마저 태백제에서 사라졌다.

 

태백시민의 축제인 태백제조차 광부들을 소외시키고 있었던 셈이다. 당시 축제 주최 측에서는 참가 광업소가 적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현직 광부 혹은 퇴직 광부들의 참가를 적극적으로 유도할 수 있는 동기부여가 부족한 것이 더 큰 원인으로 꼽힌다. 태백제의 뿌리가 광공제이고, 태백시의 승격 정체성이 석탄산업 발전이고 보면 태백시가 탄광문화의 정체성을 자랑스럽게 지켜낼 때 석탄산업전사의 진정한 성지화가 가능할 것이다.<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