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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인터뷰·칼럼

기고- 정연수 탄전문화연구소장 11 철암역두와 이중교, 도계급수탑 가치 높아

6) 탄광 디아스포라

1931년 만주사변 발발로 한반도 남부지역의 과다한 쌀 공출로 기아문제가 발생했다. 게다가 1932년과 1933년에 계속된 가뭄과 쌀 공출에 따라 낙동강 유역의 기근이 심각해지면서 민심이 악화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이를 무마시키기 위해 경상도 지역의 주민을 만주와 중국 서북지방으로 집단 이주시켜 농사에 종사하게 하는 한편, 경상·전라·충청 지역의 이재민 다수를 함북 회령의 유선탄광, 평남 대동군의 삼신탄광으로 이주시켜 부족한 탄광노무자 문제를 해결하는 탄광이주정책을 시행했다.

 

만주의 미개간 지역으로 조선인을 이주시킨 것을 두고 한반도에다 일본 농민을 이주시키려는 식민지 정책으로 보기도 한다. 모집이라는 형식을 지닌 탄광이민정책은 굶주림을 벗어나기 위해 마지못해 선택한 가난한 서민의 삶인 터라 이 당시에 이미 ‘막장인생’이라는 말이 유행하였다. 한편 경상도지역의 기근 해결을 위한 일환으로 1933년에는 삼척광구에 대한 보류 지정을 해제했다. 기근에 시달리는 경상도지역 주민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총독부가 취업 이주를 추진한 사실은 삼척탄전 개발을 허가하면서 낙동강 지역주민 고용을 조건으로 한 데서 알 수 있다. 1936년 이후부터는 경상도의 이주민들을 삼척·태백지역으로 이주하는 탄광이주정책을 통해 기근 해결과 부족한 탄광노동자 문제까지 해결하고 나섰다.

 

“개광 초기 장성에는 상당수의 중국인 근로자가 있었다고 하나 정확한 인원은 알 수 없으며 한국인 근로자로는 주로 동해안과 경북 지방의 주민이 이주하여 왔다”는 설명에서처럼 조선인·중국인·일본인 등 3개 민족의 노동자가 태백·영월 등의 탄광촌에 몰려들었다. 한편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징용된 이들도 있다.

 

영화 군함도로 알려지기도 했거니와 탄광으로 징용된 이들이 수만을 넘는다. 훗카이도 최초의 탄광인 가야누마 탄광에 동원된 조선인은 1939년부터 1945년 해방까지 1,000~1,500명으로 추정된다.

 

또 야마구치현 우베시 니시키와 해역의 초세이(長生)탄광에서는 채광작업 중에 수중갱도 매몰로 희생된 조선인만도 186명에 이른다. 이들을 위로하는 합동 천도제가 초세이탄광 수중갱도 송풍구 근처에서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중국인과 일본인이 국내로 들어왔다면 한국 정부 시기에는 한국의 광부가 해외로 나갔다. 도계와 태백지역에서 탄광기초훈련을 거친 후에 독일지역 광부로 나간 것이다. 철암지역의 파독광부 기념관은 이들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탄광 디아스포라’는 한국 석탄산업의 독특한 양상이기도 하다. 태백에서 추진하는 석탄산업전사의 예우와 성역화 공간은 파독광부까지 수용하고, 일본으로 강제 징용된 광부까지 다루는 형태로 발전할 때 명실상부한 성역화 공간으로 자리할 수 있을 것이다.

 

7) 근대문화 유산

석탄산업 유산과 관련한 지역의 시설물 중에서 문화재청에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유산이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태백의 철암역두 선탄시설과 장성 이중교, 삼척의 도계역 급수탑이 있다. 이는 석탄산업의 유산이 문화재로 기릴 가치가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고, 더 의미 있는 가치 부여를 통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철암역두 선탄시설은 2002년 5월 근대산업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되면서 귀중한 유산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철암역두 선탄시설은 철암역 뒤 우금산 기슭 일대 4,075평에 세워져 장성광업소의 무연탄 출하기지로 활용되고 있다. 철암역두 선탄시설은 1935년경 건설된 국내 최초의 선탄장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철근 콘크리트 구조와 강재를 사용한 트러스를 사용하는 등 근대 재료와 공법으로 만들어져 근대 산업시설의 대표적인 사례로 주목받아 왔다.

 

철암 역두 선탄시설은 채탄막장에서 생산한 석탄을 운반하여 선별작업을 거친 뒤 화물열차에 싣는 운반 기능을 갖추고 있다. 선탄시설 및 운영과정을 살펴보면 원탄 저장, 석탄 운반 벨트라인 시설(벨트콘베어), 화차운반 권양기 시설, 경석선별 및 괴탄 파쇄 시설, 1, 2, 3차 무연탄 선탄, 이물질 분리(침전), 각종 기계공급 및 수선창 등의 과정을 거친다.

 

이 시설은 지금까지 사용되면서 원형이 거의 보존되고 있어 일제강점기부터 시작한 태백지역의 근대 석탄산업사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철암역두 선탄시설을 활용하고 있는 장성광업소는 개발초기(일제 말)에만도 탄광노동자 수는 1,400명에 달했으며, 1980년 중반 6,000명의 탄광노동자를 가진 국내 최대규모로 국가 에너지자원 개발의 원동력이 되었다.

 

장성 이중교(二重橋, 일명 금천 이중교) 역시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가치를 인정받으면서 2004년 8월 문화재청으로부터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111호로 지정됐다. 장성 이중교는 국내 석탄산업의 발전사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교량으로 남한 최대의 탄광인 삼척탄광(장성광업소 전신) 개발 당시에 건설되었다.

 

1935년 축조된 장성 이중교는 다리 위쪽에서는 석탄수송용 전차로가 놓여 석탄 화차가 다니며, 다리 아래쪽은 사람과 자동차가 통행할 수 있도록 이중 다리로 만들어져 있다. 장성 이중교는 무연탄 최초 발견지인 금천동 거무내미 지역에서 캐낸 석탄을 장성에서 터널을 이용하여 철암역으로 수송하기 위해 시설되었다. 장성 이중교의 다리 위쪽은 2021년 현재까지 철로 레일 시설이 보존되고 있어 근대 석탄산업사의 상징물이자, 일제강점기의 수탈산업사의 자료적 가치가 크다.

 

장성 이중교를 두고 장성 주민들은 이를 이중교, 금천 이중교라고도 불렀다. 금천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다리이기 때문에 붙여졌다. 그 이름을 지금은 금천보다 큰 지역명인 ‘장성 이중교’로 통일하고 있다. 명칭을 붙일 때는 좀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금천은 우리말로 거무내미란 뜻이다.

 

거무내미는 태백시에서 최초로 석탄이 발견된 지역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금천, 거무내미 등의 명칭은 살리는 것도 의미가 있다. 장성동 금천의 옛 이름인 ‘거무내미’가 있는 장성지역은 대한석탄공사 장성광업소가 있는 곳이며,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탄광으로 자리해왔다. 처음 석탄이 발견되는 유래를 보면 1920년경 상장면(지금의 태백시 황지)에 근무하던 직원이 거무내미의 먹돌배기 근처에서 석탄 덩어리 하나를 주운 것이 일본 관리에 의해 전해진 것이다.<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