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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인터뷰·칼럼

산업전사 특별법 제정위한 제2차 포럼 기고-정연수 탄전문화연구소장 - 9

“폐광정책, 업계와 행정도 모르게 서둘러 실시했다”

지난해 본지 태백정선인터넷뉴스의 슬로건은 ‘광부의 희망, 꿈을 찾아서’였으며 (사)석탄산업전사추모 및 성역화추진위원회(위원장 황상덕)의 활동에 따른 기획특집으로 진행했다. 그리고 태백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1차 포럼 가운데 정연수 탄전문화연구소장의 주제발표의 내용 전문을 게재했다.

 

올해 주제는 석탄산업전사들을 위한 특별법 제정 및 예우, 정당한 권리를 찾기 위한 것으로 산업전사들을 위한 문화행사, 석탄산업유적지 발굴, 캠페인 등 구체적인 성과를 낼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했다. 따라서 ‘산업전사의 고향에 빛을’ 이라고 정했다. 그 첫 번째 특집으로 지난해 12월9일 강원랜드에서 열린 특별법 제정위한 2차포럼 ‘산업전사 예우 특별법 이래서 필요하다’ 주제발표 전문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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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탄광업계와 탄광지역 행정도 모르게 서둘러 실시한 폐광 정책

탄광촌이던 장성·황지·철암을 태백시로 승격시킨 것은 석탄산업도시의 기능 활성화, 탄광촌 주민의 위상제고, 석탄증산 독려 등을 위한 국가의 기획이었다. ‘광도(鑛都) 태백’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태백시는 석탄합리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폐광으로 몰락할 줄을 상상을 못 했다.

 

1986년 태백시의 시정목표는 “화합, 질서, 성실/우리는 산업역군 보람에 산다”였으며, 시정방향 4개 항 중에서 1개 항목을 “광산근로자의 생활복지 향상” 으로 제시할 정도로 광부의 삶을 중심에 두었다. 대규모 폐광이 이뤄지는 1989년 석탄합리화 정책이 시행되고도 2년이 지난 1991년의 <시민헌장>도 그 이전과 변함없이 ‘산업역군’을 중심에 놓았다. 시정목표에서는 ‘산업역군’을 삭제했으나 시정방향 5개 항목 중에서 1개 항목은 여전히 “광산마을 잘살기 운동” 이라면서 탄광촌의 정체성을 반영하고 있다. 이처럼 태백시는 시행정 자체에서도 탄광도시로 발전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고, 외부에서도 태백시는 한국 석탄산업의 메카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탄광의 문을 닫는 석탄산업합리화는 1989년 갑작스럽게 시행되었다. 탄광도시인 태백시도 몰랐고, 석탄을 생산하는 탄광업계도 몰랐고, 탄광지역의 교육행정도 몰랐다. 아무도 몰랐다. 광부들이 입주할 사택이 모자라서 이름을 아예 ‘광부아파트’라고 지은 사택을 건립했는데, 그 사택이 건립되던 때에 석탄합리화가 시행된 것도 갑작스런 정부정책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문곡동의 광부아파트, 소도동의 광부아파는 결국 민간인에게 불하되었다.

 

석탄증산으로 광부들이 증가하면서 학생들이 늘어나자 문곡동에 인문계 ‘태백고등학교’를 개교했다. 석탄합리화로 폐광되면서 광부들이 실직되어 떠나고 학생 수가 줄어들자 졸업생 한 두 번 배출하고는 문을 닫아야했다. 태백고등학교가 있던 자리로 하장성에 있던 장성여고가 1994년 이전하여 왔다. 백년지대계라는 교육계조차 석탄합리화를 짐작조차 못 했다.

 

석탄합리화와 가장 밀접한 탄광업계 역시 그 시기를 감쪽같이 몰랐다. 태백역 옆에 대규모 저탄장을 건설하던 중이었는데, 석탄합리화로 쓸모가 없어지면서 다시 복구하는데 만도 막대한 예산을 들여야했다. 수갱을 건설해놓고 문을 닫은 사례는 탄광업계가 석탄합리화 시행을 몰랐다는 것을 증거한다. 우리나라의 석탄은 노두탄이 아니라 땅속 깊은 지하에 매장되어 있어서 채탄 기간이 길어질수록 심부화가 진행된다. 지그재그형의 사갱만으로는 생산과 운반에 한계가 생기기 때문에 수갱(수직갱도) 건설이 필수적이다. 정암광업소가 “탄광의 숙원사업이었던 제1수갱을 완공하고 본격적인 심부탄광 개발시대를 열었다” 라고 평가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수갱을 두고, 대중매체에서는 ‘수갱타워’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장성광업소 제2수갱처럼 수갱에다 조명을 설치하여 멀리서 보면 멋진 레저시설처럼 화려하게 보인다. 수갱타워니, 탄광촌의 랜드마크니 하는 별칭은 수갱탑의 규모에서 나왔다. 수갱은 탄광촌의 상징물이자 대형탄광에만 있는 시설이라는 점에서 석탄산업이 남긴 소중한 유산이다. 탄광촌을 배경으로 한 사진에 수갱을 배경으로 하는 모습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그 상징성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수갱을 세운 곳은 태백시 철암동에 자리한 강원탄광이다. 1958년에 제1수갱(보조수갱)을 착공하여 1962년 국내 최초로 지하 530m의 수직갱을 완공했다. 강원탄광 제1수갱은 한국 최초의 수갱이란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또 국내 기술자가 설계하여 기계도 만들고, 차관 없이 국내 자본으로 공사를 완공했다는 점도 의미가 크다.

 

강원탄광을 경영했던 정인욱은 함태탄광의 폐광 원인으로 수갱 건설이 늦어진 점을 꼽고 있다. 함태탄광은 1980년에 수갱을 준공하여 심부 개발을 추진하였으며, 1986년에 74만6,282톤을 생산한 것이 최대 기록이다.

 

1981년에만 해도 수갱이 완공될 무렵 언론에서는 “국내 탄광개발이 수갱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떠들썩했다. 사북광업소는 1982년에 수갱을 착공하여 영구철탑은 1983년 준공하였으며, 전체 시설 완공은 1988년 12월 이뤄졌다. 해발 650m 지점에서 해저 115m까지 총 길이 765m의 수갱을 완성하면서 심부화 채탄의 길을 열었다고 환호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완공한 그다음 해인 1989년, 정부에서는 석탄산업합리화 정책 시행에 들어갔다.

 

이처럼 폐광과 석탄감산을 강요하는 석탄합리화 정책은 석탄을 직접 생산하고 있는 탄광업계조차 모르게, 앞일을 대비할 수조차 없이 갑작스럽게 진행되었다. 정부가 필요할 때는 석탄증산을 위한 다양한 시책으로 광부와 탄광촌을 몰아붙이고도, 에너지 변화로 석탄이 필요없어지자 대안도 없이 탄광의 문을 닫았다. 산업전사로 자부심을 지니던 광부는 국가에 의해 폐기처분되었으며, 광부들이 살던 도시는 생존권이 막막한 폐광촌으로 전락한 것이다. 석탄합리리화가 거의 마무리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순직 산업전사와 진폐재해 산업전사에 대한 국가의 예우가 필요한 때가 왔다.

 

하나 덧붙이자면, 탄광촌 지역에서는 수갱 같은 시설을 잘 지켜 문화재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활용하는 노력을 해야한다. 수갱에서 탑승하는 공간은 엘리베이터처럼 생겼는데 광부들은 케이지라고 불렀으며, 석탄같은 운반전용 시설을 두고는 스킵이라고 불렀다. 석탄박물관마다 엘리베이터에 수갱 케이지를 설치하여 지하 몇백m를 내려가는 듯한 연출을 하고 있다. 수갱 시설은 대형광업소의 상징이자 탄광촌을 상징할 수 있는 징표이다. 수갱은 심부화 개발을 가능하게 하는 대규모 생산의 징표이자, 수갱탑 자체는 대형광업소의 상징이었다.

 

수갱은 탄광 호황기이든, 폐광기이든 탄광촌의 랜드마크로 자리하고 있다. 탄광지역에 현존하는 수갱을 근대문화유산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하여 관리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방치하면 할수록 수갱탑은 쉽게 부식될 것이며, 탄광 소유주는 시설관리가 어렵다면서 고철로 처분하려 들것이다. 탄광촌의 상징이던 공중삭도가 하나도 남지 않고 사라진 것처럼 말이다. 수갱은 대형탄광을 상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지하 깊숙한 곳에서 채굴한 심부화의 시간적 여정을 함께 지니는 탄광 운영사의 역사이기도 하다. 수갱을 한국석탄산업사의 대표적이면서도 근대적 산업유산으로 등록하는 절차를 서둘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