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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인터뷰·칼럼

산업전사 특별법 제정위한 제2차 포럼 기고-정연수 탄전문화연구소장 2

일본제국주의가 기획한 식민지 산업전사

지난해 본지 태백정선인터넷뉴스의 슬로건은 ‘광부의 희망, 꿈을 찾아서’였으며 (사)석탄산업전사추모 및 성역화추진위원회(위원장 황상덕)의 활동에 따른 기획특집으로 진행했다. 그리고 태백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1차 포럼 가운데 정연수 탄전문화연구소장의 주제발표의 내용 전문을 게재했다.

 

올해 주제는 석탄산업전사들을 위한 특별법 제정 및 예우, 정당한 권리를 찾기 위한 것으로 산업전사들을 위한 문화행사, 석탄산업유적지 발굴, 캠페인 등 구체적인 성과를 낼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했다. 따라서 ‘산업전사의 고향에 빛을’ 이라고 정했다. 그 첫 번째 특집으로 지난해 12월9일 강원랜드에서 열린 특별법 제정위한 2차포럼 ‘산업전사 예우 특별법 이래서 필요하다’ 주제발표 전문을 싣는다.

 

1. 국가가 기획한 석탄산업과 산업전사

1) 일본제국주의가 기획한 식민지의 산업전사

1944년 《매일신보》에는 「잘 있거라 선감도(仙甘島)- 이제부터 광업전사- 제2회 연성아(鍊成兒) 40명 씩씩하게 진발(進發)」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어린 청소년에게 강요하는 노동과 산업전사의 칭호가 등장한다.

 

기사의 제목에서는 ‘광업전사(鑛業戰士)’라고 호칭하고, 기사 본문에서는 ‘산업전사’라고 호칭하고 있다. 기사 본문에는 ‘산업전사’라는 호칭을 5회나 사용하고 있다. 산업전사 이데올로기의 의식화가 이뤄지고 있는 당대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신문은 또한 어린아이까지 광부로 투입하는 당대 상황을 보여준다. 경기도 선감도에 소재한 선감학원이 아동 부랑아를 잡아다가 ‘연성(담금질)’하여 광부로 만드는 현실을 드러낸 것이다. 선감학원에 붙잡혀 있던 아이들은 삼척탄광으로 보내져서 광부가 되었다.

 

산업전사(광업전사)와 근로보국(勤勞報國)이라는 용어처럼 석탄생산과 애국을 연계하는 용어는 일제강점기부터 시작하고 있다. 전쟁 수행을 위해 석탄증산이 시급한 일본제국주의는 근로보국회 결성이라든가, 탄광징용 등을 통해 광부의 노동을 강제하고 있다. “조선인에 대한 징용은, 근로동원서(勤勞動員署)에서 근로보국회로 위임되었고, 노무보국회의 조선인 전시노무동원은 육-해군의 노무동원 명령에 따라 실시되었다.”는 공식 기록은 숱하게 남아있다. 1942년부터 일본이 패망하기까지 3년 동안 조선 사람들의 징용에 나서던 요시다 세이지(吉田清治) 요시다 세이지는 위안부 사냥에 나선 바 있다고 고백하면서, 문제를 가장 먼저 일본과 한국 내에 이슈로 부각시킨 사람이다. 그런데 그의 증언으로 위안부 문제가 표면화되기는 했으나 그의 증언 상당수가 허위로 밝혀진 아이러니도 있다.

 

탄광노동력이 급한 상황에서 일본제국주의는 근로보국대(勤勞報國隊)를 조직하고 한반도와 일본 내의 부역에 나서는데, 강원도 내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1941년 《매일신보》는 「속초근로보국대- 삼척탄광 향발(向發)」 제하의 기사에서 “속초면 근로보국대 일행 25명은 동(同)면 직원 인솔하에 23~4일 삼척무연탄광으로 발정(發程)하였는데 그들은 2개월간 동(同) 탄광에서 근로봉사를 하고 돌아올 예정이다”라고 보도하고 있다. 한반도 내의 탄광인력 부족을 근로보국대를 통하여 노동징집에 나서는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한반도 내의 한인 광부를 일본으로 견학하는 과정을 통해 근로보국의 의미를 확대하는 활동도 펼친다.

 

탄광광부들에게 ‘보국’이 ‘전사’라는 칭호를 붙이며 전사와 애국이데롤로기를 의식화하는 한편, 일본의 왕릉이나 신사 방문을 통해 일제강점기의 한인을 일본인화하고 있다. 삼척탄광 2명, 영월탄광 2명, 일반광산 6명 등 총 10명의 ‘우량 광산 종업원’은 일본의 대표적 탄광지역인 후쿠오카(福岡縣) 견학에 나선다. 일본의 대표적인 탄전으로는 규슈탄전(후쿠오가·나가사키현), 훗카이도 탄전, 죠반탄전(常磐炭田, 후쿠시마·이바라키현)을 꼽는다. 이 중에서도 “다수의 탄광이 밀집한 지역은 규슈와 훗카이도 지역으로 이곳에는 많은 한인 노동자들이 징용되어 있다.

 

삼척탄광과 영월탄광의 ‘우량 광산 종업원’이 견학이라고 찾아가는 후쿠오카는 탄광만 112개를 운영할 정도로 일본 내에서도 가장 많은 탄광을 보유한 지역이다. 후쿠오카 오무타시(大牟田市)의 미이케탄광은 하시마(端島, 일명 ‘군함도’)와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현대 한국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곳이다. 후쿠오카현청으로부터 미이케탄광까지는 차도로 85Km 내외이며, 미이케탄광에서부터 하시마(군함도)까지는 페리나 자동차로 갈 수 있으며, 거리는 94km 떨어져 있다. 삼척탄광 종업원이 견학을 간 곳이 지금은 유네스코에 등재된 일본의 탄광(하시마탄광, 미이케탄광)이 있는 후쿠오카현이었다.

 

위의 신문에서 ‘우량 광산 종업원’이 방문하는 장소를 보면 부산에서 가까이 있는 후쿠오카뿐만 아니라 멀리 떨어진 지역까지 이동하고 있다. 후쿠오카에서 야스쿠니 신사까지는 직선거리로도 1,035km나 떨어진 곳인데도 노정에 포함되어 있다. 먼 거리를 이동하는 것은 관광이라기보다는 일본인이 성역으로 생각하는 공간에 대한 참배를 위해서 기획한 것이다. 일본 왕실의 종묘로 이세신궁(伊勢神宮)으로도 불리는 이세따이뵤(伊勢大廟, いせたいびょう), 메이지 일왕의 무덤인 모모야마 고료(桃山御陵, ももやまごりょう), 일왕이 거주하는 궁성(宮城), 일본의 122대 왕인 메이지 왕의 신사인 메이지신궁(明治神宮, めいじじんぐう), 일본의 전쟁 기간에 죽은 군인 등을 추모하는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 やすくにじんじゃ) 등 하나같이 일본인 왕실을 섬기거나 일본 군인을 추모하는 제례공간을 찾아가고 있다. 견학을 빌미로 식민 제국의 관습과 사고방식을 심어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제국의 식민지 주민들은 몸과 정신을 통해 일본제국을 받아들이는 의식화 과정을 수행하는 것이다.<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