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정부가 기획한 석탄산업과 산업전사
지난해 본지 태백정선인터넷뉴스의 슬로건은 ‘광부의 희망, 꿈을 찾아서’였으며 (사)석탄산업전사추모 및 성역화추진위원회(위원장 황상덕)의 활동에 따른 기획특집으로 진행했다. 그리고 태백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1차 포럼 가운데 정연수 탄전문화연구소장의 주제발표의 내용 전문을 게재했다.
올해 주제는 석탄산업전사들을 위한 특별법 제정 및 예우, 정당한 권리를 찾기 위한 것으로 산업전사들을 위한 문화행사, 석탄산업유적지 발굴, 캠페인 등 구체적인 성과를 낼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했다. 따라서 ‘산업전사의 고향에 빛을’ 이라고 정했다. 그 첫 번째 특집으로 지난해 12월9일 강원랜드에서 열린 특별법 제정위한 2차포럼 ‘산업전사 예우 특별법 이래서 필요하다’ 주제발표 전문을 싣는다.
2) 한국 정부가 기획한 석탄산업과 산업전사
한국전쟁 기간이던 1950년 11월 1일에 국영탄광으로서 대한석탄공사를 창립하여 국가 주도로 석탄산업 확대에 나선다. 광부들은 전쟁 때도 국가의 요구에 따라 석탄을 캤으며,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도 국가의 기획에 따라 광부가 되었다. 국가의 필요에 따라 석탄산업을 기획하고 확대하여 나갔다.
민간의 수요에 의해 산업이 생겨나고 확대되는 상황과 달리 석탄산업은 국가의 정책 주도로 확대되고 축소되어 왔다. “1962년 6월 12일자 법률 제 1089호로 ‘광업개발조성법’을 제정 실시하고 획기적인 개발을 촉진하기 위하여 정부직할기업체로 하여금 광종류별(鑛種類別)로 광업개발에 대한 지도와 조성업무를 담당” 한 것 역시 국가가 석탄산업 확대에 나선 법제정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정부의 개발 의지에 의해 1965년에는 연간 석탄생산 1천만 톤을 돌파할 수 있었다.
1960~1970년대 100만 톤당 해마다 평균 13.25명이 사망했다. 국가의 석탄산업 확대 기획으로 1965년에는 석탄 1천만 톤 돌파라는 경이적인 기록에 축하가 쏟아졌는데, 그 기록을 위해 140명이 순직해야 했다. 안전시설을 확보하지 않은 채, 인력에 의지하는 채탄방식 때문에 석탄생산의 기록은 곧 광부의 순직 기록이기도 하다.
상공부에서 동력자원부로 정부 기구를 개편하는 것이라든가, 자원개발국이 있는데도 별도의 석탄국을 신설한 상황만 보아도 석탄개발은 정부가 주도적인 주체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석탄국이 존재하던 1970년대는 광부들의 순직이 가장 많던 때이자, 정부의 강요에 따라 석탄 증산이 가장 시급하던 때이기도 하다.
상공부 지휘를 받던 1970년대 초에도 석탄개발을 위한 ‘광업연구소’가 있었는데, 이 기구는 동력자원연구소로 통합되어 움직였다. ‘석탄자원연구실’이라든가 ‘광산보안기술연구실’ 등의 연구기관을 정부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석탄개발과 증산에 정부가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정부가 움직인 산업이기에 그 희생에 대한 책임 역시 정부가 져야하는 것이다.
탄좌라는 명칭은 대규모 탄광만이 가질 수 있도록 정부가 특별하게 부여한 호칭이다.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삼척탄좌 정암광업소라는 명칭에서도 그 위상이 드러난다. 지역주민들은 약칭으로 사북광업소라는 명칭 대신에 ‘동탄’이라고, 정암광업소라는 명칭 대신에 ‘삼탄’이라고 불렀다. 석탄공사의 산하광업소가 지역 내에서 광업소 명칭 대신에 ‘석공’이라고 불리듯, 사북광업소와 정암광업소 종사자나 주민들 역시 ‘탄좌’라는 호칭을 자랑스럽게 사용했다. 보통 작은 광업소는 ‘○○탄광’이나 ‘○○산업’이라 불렀고, 대규모 광업소는 ‘○○광업소’라고 업체명을 붙였다.
국영기업인 대한석탄공사가 왕족이라면, 탄좌는 귀족의 특권을 지녔다. 그것은 곧, 대한석탄공사와 탄좌를 한국 정부가 주도적으로 양성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부는 1963년 연간 30만 톤 이상 생산할 수 있는 규모의 광구를 통합하여 대단위 탄좌를 설정했다. 상공부 산하에 ‘석탄개발위원회’를 설치하여 탄좌 지정이나 개발 계획 등을 심의했다. 탄좌에는 시설투자액 75%를 장기 저금리로 융자하는 특권이라든가, 철도를 비롯한 송배전 시설과 운탄도로 개통, 산업도로 등의 기반시설까지 정부가 모두 지원했다. 대한석탄공사, 『대한석탄공사 50년사』, 대한석탄공사, 2001, p.77.
예미-정선간의 철도와 충남 남포선 등의 철도 개설 등도 탄좌의 석탄수송을 위한 시설이었다. 정부의 강력한 지원책에도 불구하고 6개 지정 탄좌 중에서 성공한 것은 동원탄좌(사북읍 사북광업소)·삼척탄좌(고한읍 정암광업소)·대성탄좌(문경시 문경광업소) 등 3개소 정도였다. 그 성공의 이면에 광부들의 순직과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정부는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1958년(단기 4291) 강원탄광 종사자(김만홍)가 받은 대통령 훈장의 ‘근로포장증’에는 “근로보국의 행적”이라고 선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국가가 ‘모범산업전사’ 시상식을 한 것이라든가, 국가가 제작한 「대한뉴스」에 산업전사와 광부를 대대적으로 보도한 일 등은 국가가 산업전사를 기획한 것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근로보국’이라든가 ‘산업전사’라는 호칭을 한국정부가 해방 이후에도 계속 끌어쓰면서 광부들을 의식화했다. 정부에서 석탄개발 계획을 세워 산업을 육성하고, 광부를 끌어들였으며, 애국이란 이름 속에서 광부들의 희생을 강요했었다. 공직자가 순직하면 예우를 다하듯, 국가의 기획에 의해 순직한 광부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죽음의 막장 현장’인 것을 알면서도 석탄개발에 나섰던 산업전사, 탄광 대다수가 문을 닫은 이제는 제대로 예우할 방도를 찾아야 할 때이다. <다음호에 계속>
정연수 소장은 태백 출신으로 현재 강릉원주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또한 그는 지난 1991년 탄전문화연구소를 설립해 탄광이 빚은 삶들을 문화영역으로 끌어올린데 이어 지난 2020년 강원도 석탄산업유산 유네스코 등재추진위원회를 설립해 활동 중이다.
'인물·인터뷰·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재영 석탄산업 역사문화 기록자 “세계 최초 시민주식회사를 기억하다!”7 (0) | 2022.02.16 |
---|---|
태백시, 2월 정례시상식 개최 업무추진유공 및 모범통반장 시상 (0) | 2022.02.10 |
태백시자원봉사센터, 이달의 태백봉사왕에 채성녀 봉사자 (0) | 2022.02.07 |
[탄광문화유산 연재] 김재영 석탄산업 역사문화 기록자 세계최초 시민주식회사를 기억하다! 제6회 (0) | 2022.01.24 |
산업전사 특별법 제정위한 제2차 포럼 기고-정연수 탄전문화연구소장 2 (0) | 2022.0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