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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인터뷰·칼럼

산업전사 특별법 제정위한 제2차 포럼 기고-정연수 탄전문화연구소장5

광부의 사망보다 참혹한 그들의 목숨값

지난해 본지 태백정선인터넷뉴스의 슬로건은 ‘광부의 희망, 꿈을 찾아서’였으며 (사)석탄산업전사추모 및 성역화추진위원회(위원장 황상덕)의 활동에 따른 기획특집으로 진행했다. 그리고 태백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1차 포럼 가운데 정연수 탄전문화연구소장의 주제발표의 내용 전문을 게재했다.

올해 주제는 석탄산업전사들을 위한 특별법 제정 및 예우, 정당한 권리를 찾기 위한 것으로 산업전사들을 위한 문화행사, 석탄산업유적지 발굴, 캠페인 등 구체적인 성과를 낼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했다. 따라서 ‘산업전사의 고향에 빛을’ 이라고 정했다. 그 첫 번째 특집으로 지난해 12월9일 강원랜드에서 열린 특별법 제정위한 2차포럼 ‘산업전사 예우 특별법 이래서 필요하다’ 주제발표 전문을 싣는다.

 

이번에는 진짜 국가의 전사와 비교해보자. 국군과 광부 어느 쪽이 더 많이 죽어 나갔는지, 경찰과 광부 어느 쪽이 더 많이 죽어 나갔는지를 살펴보자. 그 희생을 비교하다 보면 광부가 왜 산업전사로 불렸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가 석탄증산을 요구하던 시기에 탄광사고에 따른 광부 사망자는 1973년 229명, 1974년 223명, 1975년 222명, 1976년 201명 등 해마다 200명이 넘는다. 군인의 연도별 사망자 수보다 광부의 사망자 수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군 특성상 자살 숫자까지 순직으로 포함하는데, 광부의 특성상 직업병인 진폐재해순직까지 포함하면 군인의 숫자를 훨씬 초월한다. 더구나 군인 전체와 광부 전체의 숫자를 고려한 인원 대비 사망률을 비교하면 광부의 희생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런 사망통계를 비교하면 광부를 왜 산업전사라고 불렀는지, 왜 광부만을 산업전사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군인과 비교한 광부의 사망통계를 놓고 보면, 진짜 나라를 지킨 사람은 광부였다는 것이 실감 난다. 전쟁이 나면 군인은 죽을 것을 알면서 전쟁터로 나가는 의연함이 있듯, 광부 역시 막장에서 죽을 것을 알면서 채굴현장으로 의연하게 향했다. 오래 근무하면 진폐증에 걸릴 것을 알면서도 막장의 탄가루를 계속 흡입하고 살았다. 증산보국을 구호로 내세운 국가의 부름에 응답하겠다는 그 책임감 하나로 막장의 무너져가는 동발을 지탱하며 석탄을 캤다. 어디 탄가루뿐이랴, 막장 속의 35도 내외를 오르내리는 지열이라든가, 습도 80%를 넘어서는 막장 공간을 견디었다. ‘숨 쉬는 것도 노동’이라는 광부의 유행어가 있듯, 가만히 있어도 숨이 막히고 땀이 흐르는 막장에서 오직 석탄증산에만 몰두한 광부들이다.

 

우리 정부는 경찰의 질병 사망까지 순직으로 포함하여 예우를 다하고 있다. 나라를 지키고, 국민을 지키던 경찰관이기에 당연히 그런 보상과 예우가 뒤따라야 한다. 광부 역시 일반 산업과 달리 국책 사업에 종사하던 이들이다. 광부들은 국군이나 경찰의 책무에 못지않게 그 역할을 다했다. 6·25 한국전쟁 발발 중에 국영기업인 대한석탄공사를 설립할 만큼 석탄생산은 국가적으로 시급하고도 중대한 일이었다. 2021년 현재까지 대한석탄공사 체제를 유지해야할 만큼 석탄은 국가의 기간산업이었다. 오늘날 한국의 경제선진국을 자랑하는 성과를 거두기까지 석탄생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국의 광부는 국가의 산업을 위해, 국민의 난방 연료인 연탄을 위해 지하 막장에서 노동하다가 순직한 이들이다. 그리고 퇴직 후에는 광부의 직업병인 진폐증으로 불치의 고통을 겪고 있다. 경찰의 질병 순직과 광부의 진폐 순직 역시 그 값어치나 무게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김선자 씨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김선자 씨는 3대에 걸쳐 4명이 광부로 살았는데, 동일한 시기에 광부로 근무한 것은 아니다. 이 지점은 탄광촌의 비극이자, 광부 가족의 비극이 심화한 고통이기도 하다.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가족이 탄광에서 순직하자, 남은 가족 중의 한 명이 다시 탄광으로 들어가야 했다. 탄광은 재해가 빈번한 현장이므로 죽을 자리를 알면서도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비장한 선택 이면에는 순직사고에 대한 적절한 보상책이 마련되지 않은 제도적 문제도 있다.

 

광부의 목숨값은 ‘산업전사’라거나 ‘증산보국’ 같은 애국 논리에 묻혀 흔한 사고 중의 하나로 치부되었다. 1년에 200명의 광부가 순직하는 사고이다 보니 탄광 내에서는 흔한 사고로 용인되었고, 탄광의 바깥에서는 ‘산업전사’의 당연한 희생으로 치부되었다. 순직 산업전사의 현실적 보상을 두고 유족 몇몇이 탄광 사무실에 찾아가 악을 쓰면서 울다가 지쳐오는 게 전부였다. 유족보상금만 적절했더라도, 가족이 죽은 탄광을 향해 제 발로 걸어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선자 씨의 사위(박홍식, 흥전갱 채탄)는 30년 넘게 도계광업소에 재직했다. ‘아버지-딸-사위’로 이어지는 광부 3대 집안은 대를 이어 광부 직업병을 앓고 있다. 광부의 딸이던 김 씨는 진폐재해자가 되었고, 그녀의 사위는 광부 직업병의 하나인 만성폐쇄성 폐질환 재해자가 되었다. 김선자 씨의 사위는 호흡기 직업병의 일종인 COPD(만성폐쇄성 폐질환) 3급 판정을 받았다. 3급, 7급, 11급 3종류가 있는데, 가장 장애 등급이 높은 3급을 받았을 정도로 장해 정도가 심하다.

 

김선자 씨는 1969년 입적을 했다. ‘입적’이란 광업소 입사를 뜻하는 말로, 1980년대 중후반까지 탄광촌에서는 주로 입적이라는 단어를 썼다. 김 씨는 1995년 55세 정년을 맞아 퇴직하기까지 26년간 여자광부로 일했다. 여자광부로 불리는 선탄부의 상당수는 남편을 탄광에서 잃었다. 산업전사 유가족이 산업전사가 되는 악순환의 비극을 국가는 기억해야 한다. 김선자 씨는 29세 때, 남편을 잃는다. 김 씨는 광부이던 남편이 퇴근 후에 술을 많이 마신 탓에 병을 얻어 일찍 세상을 떴다고 한다. 남편을 잃은 김 씨는 가정의 경제를 책임지는 가장의 역할을 맡았다. 18세 때에 첫 딸을 낳아 5남매를 키우던 김 씨는 도계광업소 선탄부로 들어갔다. 당시 아버지는 도계광업소 궤도반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터라 취직할 때 그 ‘빽’도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주부의 일자리가 없는 탄광촌에서는 선탄부로 취직하기를 희망하는 여성들이 많았다. 그래서 순직광부 유가족에게 취업 우선 혜택을 주는 것이다.

 

광업소 측에서는 탄광에서 재해가 발생하면 가족의 취업 혜택을 마련하기 위해 규정으로 우선권 조항을 두기도 한다. 1980년대 동원탄좌 사북광업소의 단체협약 제3장 19조를 보면 “회사는 종업원을 채용함에 있어 지원자 중에 순직자, 정년퇴직자, 일시 보상퇴직자의 자제가 있을 때는 동일조건 하에서는 이를 우선 채용한다”라는 조항을 명시하고 있다. 대를 잇는 탄광 입사를 일종의 특혜로 여기는 것은 광부 가족의 열악한 경제 실정을 반영하는 것이다.

 

선탄부든, 채탄직 광부든 탄광에 우선 취직시켜준다는 조건은 유족과 보상금 협의를 유리하게 하는 조건일 뿐이다. 결국은 광부 유가족 중의 한 명마저 광부가 되어 또 순직하거나 진폐증을 앓는 등 가족의 삶은 더 열악해지는 악순환의 결과를 낳고 만다.

 

김선자 씨는 남편을 탄광에서 잃지않고 선탄부가 된 드문 사례에 해당한다. 면담 자리에 함께 있던 홍영식 씨(진폐 9급, 도계광업소 채탄부로 시작해 채탄반장으로 퇴직)은 “당신, 아버지 특혜봤네”라고 얘기하는데, 김 씨는 “덕을 봤다”며 동의한다. ‘빽을 써서’, ‘아버지 덕을 봐서’ 광업소에 입사하여 선탄부가 되었다는 김선자 씨는 탄광노동자의 삶 자체가 고통이었다.

 

김선자 씨는 26년을 근무하고 1995년 정년을 맞아 퇴직하는데, 전년도인 1994년 2월 14일 진폐판정을 받았다. <산업재해보상보험-합병증 등 예방관리 결정통지서>에 ‘장해등급 : 13급 12호’라고 기록한 판정문을 받았다. 탄광노동자에게 불치의 직업병으로 알려진 진폐재해자가 된 것이다. 김 씨는 진폐판정을 받고도 1년을 더 근무했다. 선탄부로 살 수밖에 없었던 26년의 탄광노동자 삶 끝에 불치병인 진폐증이 무슨 악마를 닮은 복병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퇴직한 후에는 노후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병마와 싸워야하는 것이 산업전사 광부의 운명이었다. 도계에서 김선자 씨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가래 섞인 그녀의 목소리가 계속 떠나질 않는다. 걸을 때마다 숨이 찬다는 그녀의 목소리가 지금도 계속 그렁그렁, 그렁거리고 있다.<다음호에 계속>

 

정연수 소장은 태백 출신으로 현재 강릉원주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또한 그는 지난 1991년 탄전문화연구소를 설립해 탄광이 빚은 삶들을 문화영역으로 끌어올린데 이어 지난 2020년 강원도 석탄산업유산 유네스코 등재추진위원회를 설립해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