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가까워서 놀랐다.’ 다큐멘터리스트 박정숙 감독은 몇해 전 여행자로 처음 소록도를 찾았다. 전라남도 고흥군 녹동항에서 뱃길로 불과 600m. 지리적으로 이렇게 가까운 소록도에는 그동안 결코 뛰어넘지 못했던 차별과 억압이라는 심적인 거리가 존재하고 있었다. <동백아가씨>는 ‘문둥병’이라는 속어로 지칭되던 한센병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고통받은 한센인들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어느 누구의 사연을 들어보더라도 족히 한 시간은 됨직한 기구한 사연들 속에서 박정숙 감독이 기록한 사람은 다름 아닌 74살 초로의 이행심 할머니다. 1934년 한센인 격리정책이 활발했던 시절, 이행심 할머니는 네살 나이에 부모님을 따라 소록도에 들어온다. 이후 부모님과 사별하고, 일제의 강제노역과 배고픔에 시달리면서 한센균이 그녀의 몸을 잠식해갔다. 병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결혼한 그녀에게서 임신의 자유와 양육권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동백아가씨>는 할머니의 기구한 개인사를 통해 한센병에 대한 우리 사회의 야박한 이면을 드러낸다.
철도 여성노동자들의 척박한 노동환경을 그린 전작 <소금-철도 여성노동자 이야기>를 비롯해 그간 박정숙 감독의 카메라는 소외받는 여성노동자들의 삶을 비추어왔다. 사회의 약자인 노동자들, 그 노동자들 속에서조차 거들떠보지 않는 여성노동자들의 삶을 기록하던 감독의 전공에 비춰볼 때 노동문제를 벗어난 이번 작품은 의외인 셈이다. 그러나 선동이나 선언이 아닌 같은 여성으로 여성노동자의 삶을 이해했던 그녀의 시선만은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다. <동백아가씨>는 우리가 한센인에게 지금까지 가졌던 인식에서 벗어날 것을, 그들도 나와 다른 존재가 아닌, 우리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여성이자 어머니라는 점을 상기시켜준다. 그래서 동화를 곁들이는 등 쉽게 풀이된 다큐멘터리 속에는 소록도라는 심적 거리가 만든 곳의 별종이 아닌, 내 옆집 할머니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동백아가씨>는 자극이 없는 무공해 다큐멘터리다. 다큐멘터리 80%는 할머니의 회상을 통한 심심한 기록들뿐이다. 게다가 전문성우가 아닌 감독 자신의 육성은 다소 거칠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드러내는 진실은 말할 수 없이 아프다. 관객은 영화의 말미 한센인보상청구소송에 패한 할머니의 무덤덤한 얼굴을 보면서도 눈물이 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무지했던 역사적 진실 앞에서 한없이 부끄러웠다’는 감독의 변처럼, 관객의 눈물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비롯됐는지 모른다.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이 땅의 한센인과 그 자녀들을 위한 1%의 희망, <동백아가씨>는 이 작은 퍼센테이지의 변화를 위한 가장 따뜻한 기록이다.
tip/ 박정숙 감독은 1994년 노동자뉴스제작단에서 활동을 시작, 그 2년 뒤 ‘다큐희망’이라는 프로덕션을 설립했다. 노동자, 특히 그중에서도 소수자인 여성노동자를 위한 다큐멘터리를 찍었다. 대표작으로는 화학약품에 중독되어 불임이 된 LG전자부품 여성노동자들의 노동환경을 그린 <담장안 직업병 담장밖 공해병>(1998)을 비롯, 집단 정리해고된 현대자동차 식당 여성노동자를 조명한 <평행선>(2000), 그리고 과한 업무로 낙태와 육아의 부담에 시달리는 철도 여성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소금-철도 여성노동자 이야기>(2003)가 있다./씨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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