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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인터뷰·칼럼

기고-정연수 탄전문화연구소장6 기업주는 문화유입을 철저하게 차단했다

지난해 본지 태백정선인터넷뉴스의 슬로건은 ‘광부의 희망, 꿈을 찾아서’였으며 (사)석탄산업전사추모 및 성역화추진위원회(위원장 황상덕)의 활동에 따른 기획특집으로 진행했다. 그리고 태백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1차 포럼 가운데 정연수 탄전문화연구소장의 주제발표의 내용 전문을 게재했다.

 

올해 주제는 석탄산업전사들을 위한 특별법 제정 및 예우, 정당한 권리를 찾기 위한 것으로 산업전사들을 위한 문화행사, 석탄산업유적지 발굴, 캠페인 등 구체적인 성과를 낼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했다. 따라서 ‘산업전사의 고향에 빛을’ 이라고 정했다. 그 첫 번째 특집으로 지난해 12월9일 강원랜드에서 열린 특별법 제정위한 2차포럼 ‘산업전사 예우 특별법 이래서 필요하다’ 주제발표 전문을 싣는다.

 

2. 광부와 탄광촌의 현실

1) 국가의 방치 속에서 문화적 불모지가 된 탄광촌

1973년 무렵 가톨릭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가 직접 나서고, 김수환 추기경도 지원한 김지하 시인의 문화운동이 있다. 당시 김지하가 쓴 희곡 「금관의 예수」가 전국을 순회하면서 공연에 나섰다. 또 이 공연에는 아침이슬의 작곡가 김민기를 비롯한 많은 연극패가 참가했다. 가시면류관을 쓰고 십자가를 졌던 예수에게 금관을 씌운 것은 가난하고 힘없은 사람을 위해 나서는 대신 권력 있는 자와 타협하고 권력자의 편에 선 한국의 교회와 사회 현실을 비판한 작품이다. 그래서 희곡에는 겨울에 거리로 나선 거지, 문둥이, 창녀들을 돕는 수녀, 이들을 등쳐먹는 경찰과 악덕 업주, 이들을 외면하는 대학생과 신부가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시멘트 감옥에 갇혀 금관을 쓰고 있던 예수가 문둥이에게 금관을 벗어주는데, 신부와 경찰, 사장이 달려들어 다시 예수에게 씌우고는 시멘트는 굳는다.

 

양희은과 김창남(메아리)을 통해 불리던 이 노래 <금관의 예수>는 1973년 원주가톨릭회관에서 초연된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 첫머리에 등장한다. 기득권층에 의해 세상의 고통을 십자가처럼 짊어지고 가시면류관을 쓴 예수의 삶과 민중의 삶을 다룬 희곡 「금관의 예수」는 상연 금지처분을 받고도 재공연에 나섰다. 또 희곡 앞 부분에 등장하는 이 노래는 종교계뿐만 아니라 노동계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약자를 위한 노래라는 점이 공감대를 얻었을 것이다. 노동자들 같은 약자들이 부르면서 방송금지곡이 되었지만, 지금까지도 민중들 사이에서 사랑을 받고 있다.

 

「금관의 예수」라는 희곡이 도계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1971년 도계의 흥국탄광에서 도피 생활을 하던 중에 김지하가 쓴 작품인 것이다. 그리고 이 희곡의 앞머리 시에다 곡을 붙인 이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다 알만한, 데모 현장에는 한 번쯤은 불리는 「아침이슬」의 작사·작곡가인 김민기이다. 김민기는 이 노래 때문에 전방으로 끌려갔다는 일화도 있다. 도계의 탄광이 있었기에 「금관의 예수」가 탄생할 수 있었는데, 더 흥미로운 일은 작곡자 김민기 역시 탄광과 인연이 깊다는 점이다.

 

1980년대든, 1990년대든 내내 사람들은 탄광촌을 문화의 불모지라고 했다. 필자가 태백에서 문학활동을 본격적으로 하던 1980년대도 태백시 사람들은 스스로 문화의 불모지라고 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광부들만 사는 탄광촌이어서 문화의 불모지인가 여겼다. 그런데 감춰진 역사를 들춰보니 태백탄광촌이든, 도계탄광촌이든, 보령탄광촌이든 광부가 있는 탄광촌이어서 불모지였던 것이 아니었다. 광부를 우매하게 만드는 정책, 국가권력 때문이었다. 탄광촌에 문화를 보급하지 않은, 광부가 각성하지 못하도록 한 정부와 탄광기업주의 통제 때문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문화란 음주문화가 아니고, 21세기의 관광문화니 생활문화니 하는 광의적 의미도 아니다. 문학·음악·미술 등의 협의적 의미의 문화, 개인의 자존을 세우고, 개인의 정체성을 찾고, 개인의 삶을 향한 각성을 가능하게 하는 문화를 말하는 것이다. 사전에서 설명하듯 “높은 교양과 깊은 지식 또는 세련된 아름다움이나 우아함, 예술풍의 요소 따위와 관계된 일체의 생활 양식”을 말한다. 국가권력은 탄광촌이 문화의 불모지라는 것을 알면서도 문화보급에 나서지 않았으며, 탄광기업주는 문화가 들어오는 것을 철저하게 차단했다.

 

탄광촌이 거부한 김민기도 그런 사례의 하나이다. 태백탄광촌에 김민기가 일자리를 찾겠다고 광업소에 찾아왔는데, 의식있는 노래 운동을 하는 사람이라고 받아주지 않았다. 「아침 이슬」을 수록한 김민기 1집은 1971년에 나왔고 김민기가 태백에서 탄광노동을 시도한 것은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로 보인다. 김민기의 1집은 국가에서 금지되었으나 입소문을 타고 그의 음반은 명작 반열에 올랐으며, 불법 복제까지 급증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금관의 예수」는 김민기 3집에 수록되어 있다.

 

도계탄광촌에는 김지하 같은 위대한 시인이 오래도록 생활했는데도 그가 머물렀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도 없다. 그뿐 아니라, 도계주민 중에는 김지하가 시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도 드물다. 이것은 도계주민이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시인과 소설가의 작품을 읽으면서 문학을 하고, 독서를 하는 문화프로그램을 보급하지 않은 국가권력의 잘못이기 때문이다.

 

김민기가 충남 보령탄광촌에서 광부생활을 했으나 그를 기리는 문화활동은 계승되지 않는다.

 

삼척 도계·태백·보령 탄광촌은 최고의 시인 김지하를 받아주지 못하고, 최고의 작곡가이자 연출가인 김민기를 품어주지 못했다. 당대는 독재정권 시절이었다 하더라도 문화의 세기로 접어든 21세기에서도 여전히 그들을 품지 못하고 있다. 지금껏 우리는 ‘강아지가 만 원짜리 물고 다닌 시절이 있었다’는 거짓말만 내뱉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강아지가 만 원짜리 물고 다닌 시절이 있었다’는 그 말로 지금보다는 그때가 더 나은 세상이라고 위안하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탄광이 번성하던 1970년대, 서른 댓살 먹은 탄광경영자는 벤츠를 타기도 하고, 어떤 탄광사장은 고급 요정 집에 드나들기도 했다. 그런 호황 속에서 광부들은 여전히 10평도 안 되는 낡고 좁은 사택에서 살았다.

 

20~30%의 광부는 그런 사택도 얻지 못해 방세에다 외상 맞장부에다 빚에 허덕였다. 안전시설이 없는 탄광막장에서 언제 죽을지도 모를, 죽어서도 보상금은 강아지값도 안 되는 그 시절을 견디었다. 그런데도 그 시절이 ‘강아지가 만 원짜리 물고 다닐만큼 좋은 때’라고 얘기하고 싶은 것은 2021년 폐광이 되어버린 지금의 탄광촌 현실이 1970년대나 1980년대만큼도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정연수 소장은 태백 출신으로 현재 강릉원주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또한 그는 지난 1991년 탄전문화연구소를 설립해 탄광이 빚은 삶들을 문화영역으로 끌어올린데 이어 지난 2020년 강원도 석탄산업유산 유네스코 등재추진위원회를 설립해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