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힌 광부의 삶 기록 작업은 우리의 손으로
지난해 본지 태백정선인터넷뉴스의 슬로건은 ‘광부의 희망, 꿈을 찾아서’였으며 (사)석탄산업전사추모 및 성역화추진위원회(위원장 황상덕)의 활동에 따른 기획특집으로 진행했다. 그리고 태백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1차 포럼 가운데 정연수 탄전문화연구소장의 주제발표의 내용 전문을 게재했다.
올해 주제는 석탄산업전사들을 위한 특별법 제정 및 예우, 정당한 권리를 찾기 위한 것으로 산업전사들을 위한 문화행사, 석탄산업유적지 발굴, 캠페인 등 구체적인 성과를 낼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했다. 따라서 ‘산업전사의 고향에 빛을’ 이라고 정했다. 그 첫 번째 특집으로 지난해 12월9일 강원랜드에서 열린 특별법 제정위한 2차포럼 ‘산업전사 예우 특별법 이래서 필요하다’ 주제발표 전문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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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광산보안법이 발효된 이래 각종 광산재해는 3,600건 이상 발생하였고 722명의 사망자를 합쳐 무려 2만 5,000여 명이 재해를 당했다(《매일경제》, 1968. 4. 27). 사고 발생 이유는 대개 땅속으로 더 깊이 파고 들어가다 보니까 위험도는 갈수록 증가했다. 이에 광업계는 산업재해보험법에 의거한 보상금과 위자료 청구소송이 갈수록 늘어났다. 1968년 기준으로 위자료 청구소송이 제기된 사례는 석탄공사가 102건, 민영광산이 52건 등 총 154건에 청구액도 2억 1,000만여 원에 달했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연탄은 서민들의 땔감이었다. 서울시민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곧 사정이 바뀌었다. 수도가 등장하면서 물장수가 사라졌듯이 가스가 등장하면서 연탄도 자취를 감췄다. 이제 석탄을 이용하는 곳은 제철소뿐이다. 세월의 변화 속에서 탄광산업은 한물간 사업이 되어버렸지만 1960~70년대 탄광산업은 경제건설의 기간산업이자 서민들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위의 사고 기록은 탄광경영주 채현덕 사장이 직접 기술한 것이라는 점이 놀랍다. 그 점이 채현덕 사장과 다른 탄광 경영주의 다른 점일 것이다. 강원탄광의 정인욱 사장을 비롯하여 몇 명 사장이 전기문을 만들었으나 그 안에는 광부의 삶이 담겨 있지 않고, 개인의 치적을 중심에 놓고 있다. 채현덕이 남긴 경동의 사고 같은 상세한 기술을 찾아볼 수 없었다. “탄광사고는 이전에도 빈발했다. 흥국탄광은 물론 다른 탄광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날의 사고는 그중에서도 대형 사고였다.”는 채현국 사장의 고백은 참으로 가치있는 기록이다.
탄광에는 언제나 각종 사고가 잦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다치고 죽었다. 모든 사고는 결국 아버지를 대신해 사실상 경영을 맡고 있던 나의 책임이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상하는 일로 돈을 벌었으니…나는 칭찬받아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탄광사고 이후 흥국탄광은 물론 용인과 양산에 있던 묘포장과 농장 등 계열사 전부를 매각해 피해자에게 보상해주고 그들의 고용 승계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나머지 계열사들은 엄밀히 따지면 법인이 달랐으며 탄광사고에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이치를 따지면 영영 남들에게 못 돌려주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주위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일을 처리했다. 그렇게라도 해야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사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도 내 마음 편하자고 그렇게 한 것일뿐, 기껏 돈 몇 푼으로 어찌 그들의 상처를 완전히 낫게 할 수 있겠나. 어림없는 일이다. 그렇게 나는 탄광사업을 접었다.
채현국의 진심이 담긴 참회록이다. 마치 성당의 고해소 신부님 앞에서 진심으로 참회하면서 고해성사를 받는 참회록과 같다. 광부에게 진심을 담아 사과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은 그의 행동 때문이다. 탄광사고 이후 자신이 지닌 모든 사업체를 매각해 보상에 나섰다. “그렇게라도 해야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사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다른 재산까지 모아서 보상한 점이라든가, 그 일로 흥국탄광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탄광을 떠난 점에서도 진정성이 보인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나서도 그 일을 다시 회상하면서 “물론 그것도 내 마음 편하자고 그렇게 한 것일 뿐, 기껏 돈 몇 푼으로 어찌 그들의 상처를 완전히 낫게 할 수 있겠나”라면서 순직 광부 유가족이 입은 상처에 대하여 끊임없이 사죄를 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채현국의 사람 됨됨이를 한국 사회가 기리고 있으며, 신용불량자가 될 정도로 무일푼으로 살다가 세상을 떠났을 때 많은 이들이 그를 추모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림 1959년에 제작한 강원탄광 앨범 발굴을 소개하면서 탄광문화 아카이브 구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산업전사 성역화추진위의 황상덕 위원장(좌)과 남해득 부위원장. ‘백만톤’이란 글자에서 보듯 강원탄광 백만톤 달성을 기념하여 제작한 앨범으로, 직종별로 노동자 모두를 사진으로 담고 있다.(2021)
역사를 기술할 때는 사건의 실체만큼이나 관점 역시 중요하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사대주의적 관점에서, 일연의 『삼국유사』는 우리 민족의 주체적 관점에 기술한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신라에서부터 조선까지 모든 기록이-세계사도 그러하지만-모두가 왕이나 장군 중심의 역사이거나 승리자의 입장에 쓴 기록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민중의 관점에서 들여다보는 역사가 드물다. E·H·카가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지적했듯, 역사는 역사가가 채택하여 역사가의 입장에서 쓴 글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채현덕사장은 경영주이면서도 「회사 팔아 피해자 보상」이란 제하의 글은 탄광노동자를 생각하는 관점에서 기술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흥국탄광의 채현덕 사장이 기록한 『쓴맛이 사는 맛』과 다른 광업소가 제작한 책은 기술의 관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경동광업소가 최근 제작한 자료집을 보면 노동자의 시각이 보이지 않는다. 치열한 노동투쟁으로 한국노동사에도 기록되는 경동파업 같은 얘기는 사진이든, 연혁이든 단 한 페이지도 없다. ‘3년 연속 무재해 달성’이나 ‘12회 무재해 달성’ 치적 같은 연혁은 있으나 순직한 광부에 대한 언급이나 사죄의 글도 없다. 채현덕이 흥국탄광을 돌아본 관점과 큰 차이가 있다. 또 연혁도 ‘1974년 2월 경동탄광(주) 창립’에서 출발한다. 전신인 ‘흥국탄광’의 10여 년 역사는 송두리째 빼고 시작한다. 갱구와 막장, 그리고 탄광노동자는 같은데도 광업소 명칭이 바뀌었다고 하여 그 부분을 계승하지 않은 것이다.
산업전사 성역화 추진위 황상덕 회장이 발굴한 자료인, 1959년에 만든 강원탄광 앨범에는 채탄부와 굴진부는 물론이거니와 선탄부도 있고, 운전공도 있다. 경동광업소 자료집처럼 몇 명의 광부만 작업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강원탄광 전 종업원의 얼굴이 나오도록 앨범을 제작했다. 다른 광업소가 발행하는 자료나 경영주가 발행하는 자료는 대부분 광업소 경영의 입장을 중심으로 놓고 보여주기식으로 제작되었다.
광업소 측이 제작하는 자료에 채현덕처럼 광부들을 중심에 놓고 기술해줄 것을 바라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여, 이제는 잃어버린, 잊힌 광부의 삶을 기록하는 작업을 우리의 손으로 시작해야 한다. 산업전사 예우 작업은 ‘산업전사 위령탑 중심의 성역화’가 아니라 광부의 삶을 온전하게 드러내는 일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새로운 세계의 역사는 민중의 역사인 것처럼, 우리가 탄광의 중심인물인 광부의 역사를 다뤄야 한다. 광부의 삶이 온전히 드러날 때 우리 한국사회는 왜 이들을 산업전사로 불러야하는지, 왜 이들을 유공자로 대우해야 하는지, 이들의 삶이 어째서 다른 산업영역의 역군과 다른 전사인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태백과 삼척이 탄광이 폐광하면서 실직한 광부가 안산으로 공단을 찾아 떠났다가 세월호에다 자식을 잃은 이들이 있었다. ‘가만 있으라’는 말을 들었다가 참변을 당한 세월호는 우리 시대의 비극이다. 광부였던 우리 동료가 자식을 겪은 슬픔이기도 하다. 그런 세월호(304명 희생)를 탄광에서는 해마다 막장에다 한 척씩 묻어왔다. 해마다 200명 가까운 순직산업전사, 그 숫자보다 더 많은 진폐순직재해자가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산업전사의 비극을 이제는 200명, 2,000명, 2만 명이라는 숫자가 아니라, 일일이 이름을 부르면서 호명할 수 있도록 그들의 위대한 전기집을 만들어야 한다. 위인에게는 위인전이 있듯, 우리시대의 영웅인 산업전사에게는 그에 걸맞은 영웅전을 편찬해야 한다. 기구한 광부의 생애 구술 기록과 수기, 전기, 편지, 르포 등 다양한 사건 기록 일지를 토대로 기록을 담아야 한다. 특히 산업전사의 생애구술사 작업은 위령탑 공간 확대라든가, 광부상 제작보다 더 중요하고도 시급한 작업이다.
2021년 올해, 흥국탄광 경영주 채현덕이 세상을 떠난 것처럼, 노쇠한 광부들이 점점 세상을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떠난 광부를 추모하고 그리워할 수는 있어도 그의 생애를 호명하며 대화할 수는 없다. 『산업전사 영웅전』 편찬 사업을 산업전사 예우를 위한 주요 사업으로 추진할 것을 제안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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