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는 산업전사로 호명되는 동안 국가의 중요 사업에 동참하는 애국과 자부심을 지닌 전사상으로 내면화한다. 일제강점기에 발행한 신문이나 잡지 곳곳에서 노동자를 산업전사로 의식화하는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1939년 제7대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는 “산업경제에 관계하는 모든 사람은 총후 (銃後: 전장의 후방) 경제전의 전사(戰士)임을 자각하고 생산력 확충에 매진” (동아일보, 1939.1.4.)하자고 주문했고, 「불놀이」라는 시로 널리 알려진 한국근대시의 대표적 시인인 주요한은 한 산문에서 “어떠한 생산에 종사하는 사람이고 간에, 또는 그 생산부문의 산업전사로서 어떠한 지위에 처한 사람이고 간에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는 채산(採算)을 도외시하며 사익(私益)을 초월할 것” (주요한, 「최저생활의 실천」, 『신시대』, 1943년 3월호.)을 주문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노동자를 산업전사로 일체화하는 명명의 강도는 한층 강해졌다. 1943년에 등장한 “우리가 갈 길은 하나. 나서라 산업전사! 미・영(米英) 격멸에”(매일신보, 1943.6.6.) 등이 그런 것이다. 전쟁터에서 싸우는 ‘군인 전사’와 후방에서 국가의 산업을 위해 싸우는 ‘노동자 전사’를 동일시하고 있다.
산업전사는 총력전의 강인함, 건강함을 대표하는 상징물로 구현되었다. 산업전사에게 건강한 신체는 산업전사 이념을 표상하는 상징이며 또 지향점이었다. 산업전사의 몸은 개인의 몸이 아니라 ‘성전을 완수해야할’ 중요한 신체가 된다. 근대 국가권력의 노동자에 대한 시선은 훈육하여 규율화된 인간형을 주조하여 통제 가능한 ‘국민’ 만들기에 있다. 이에 더하여 전시에는 개개인을 전장의 한 병사이자 국가의 전사로서 호명함으로써 국가의 지배적 명령을 신체에 체화시키기 위한 장치들이 동원된다.(이병례, 앞의 책, p.44.)
‘전쟁-애국’, ‘전사-산업전사’, ‘전투-석탄생산’, ‘보국대-보국증산’ 등의 이데올로기를 일체화하면서 노동자의 신체를 국가의 전투력으로 환원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산업전사로 불린 광부는 전쟁에 혈안이 된 일본제국의 식민지 주민이 겪는 고통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해방이 된 이후에도 이 땅의 광부는 계속 산업전사로 불렸다는 데서 비극은 더욱 심화한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인 노동자를 동원하고 강제화하기 위해 도입한 ‘산업전사’라는 용어는 해방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부터 정작 일본에서는 ‘산업전사’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국가권력이 나서서 더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해방이 찾아오고, 6·25 한국전쟁이 끝나 평화의 시대가 도래해도 한국의 광부는 평생을 산업전사라는 호칭 속에서 긴장하면서 살아야 했다. 제국주의의 식민지 생활이 끝나고, 민족끼리의 한국전쟁이 끝났어도 여전히 한국 광부들은 국가의 요구에 의해 산업전사로 산 것이다. 한국의 산업화를 위해 가장 필수적인 에너지원인 석탄생산을 위해 국가가 ‘전사’를 활용한 것이다.
산업전사는 후방에 있으나 전선을 앞에 둔 것과 같은 정신자세를 갖추도록 요구되어졌다. 소위 후방의 군대와 마찬가지인 산업현장의 ‘전사’는 사회 그 어떤 분야보다 엄격하고 규율이 잡힌 공간이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전투군단으로 전환된 노동현장의 일상은 언제든 전투에 나설 수 있도록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는 군대식 규율이 구현된다. 노동의 전사화는 단지 ‘산업전사’로의 호명 차원을 넘어서 일상생활이 항상 전시 태세로 유지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위의 책, p.44.)<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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