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도태백에서 한국석탄산업 유산 성지로
6. 맺음말
1) ‘석탄산업전사의 날’ 지정
1910년대의 평양광업소와 1220년대의 아오지탄광 등 남한보다 석탄산업을 먼저 시작한 북한에서는 해방 이후 광부절까지 만들어서 광부들을 위한 예우에 나서고 있다. 또 광부절(鑛夫節)에 이어 석탄광부만을 위한 탄부절(炭夫節)까지 제정하고 나섰다. 1955년 제정한 광부절이 있는데도, 1990년 10월 31일에는 탄부절을 제정한 것이다. 광부절에 포함하여 석탄광부를 기념하다가, 석탄광부를 별도로 분리하여 예우할 만큼 석탄산업이 지닌 가치가 큰 것이다. 1991년부터 탄부절은 7월 7일, 광부절은 9월 15일(세번째 일요일)에 맞춰 기념했다. (통일원 자료)
그런데 1993년 들어서는 탄부절은 7월7일 그대로 두고, 광부절을 7월 1일로 옮겼다. 북한의 선전매체에서는 광부절을 7월 1일로 옮긴 것은 “1975년 7월 1일 김정일이 ‘검덕광업연합기업소’를 방문한 날”의 기원을 찾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1997년에 한 차례 더 바뀌는데 탄부절을 4월 24일로 변경하고 광부절은 7월 1일 그대로 시행하여 2021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편 통일부가 제작한 《북한 주요 행사 예정표》는 광부절이 1957년 7월 5일에 제정되었다고 기록하는데, 이는 오기로 보인다. 북한은 1955년에 이미 첫 탄부절을 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동신문 1955년 8월 31일 자에서 「첫 탄부절을 로력적 성과로 맞이, 사리원 탄광에서」라는 기사를 보냈고, 같은 신문 9월 1일 자에서 「작가 예술인들 탄부절을 기념하는 작품 창작에 정진」 등의 기사를 다룬 바 있다.
그해 같은 신문 9월 18일 자 1면에는 김일성의 축하문 「공화국 탄부절에 제하여 석탄 공업 부문의 전체 로동자, 기술자, 사무원들에게!」 도 실렸다. 북한의 광부절 기원은 탄부절이었던 것이다. 러시아(당시 소련)가 탄부절을 제정하여 기념하고 있었는데, 북한이 러시아의 탄부절 경축 인사를 보낸 것으로 보아 이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북한에선 1955년부터 탄부절로 지내다가 이를 광부절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다시 1990년에 탄부절을 제정한 것이다.
태백의 산업전사위령제는 1975년 산업전사위령탑 제막과 함께 시작하여 태백광공제 기간에 열렸다. 광공제가 폐지된 이후에는 태백제 기간에 위령제를 올리고 있다. 탄광이 활성화할 때 지역의 문화제 첫 순서는 늘 순직 광부를 기리는 위령제였다. 태백의 광공제, 정선의 사북석탄문화제, 영월의 강원도탄광촌 문화제 모두 위령제를 시작으로 막이 올랐다. 그러나 아직 산업전사의 희생에 대한 국가 차원의 예우는 없는 실정이다. 유가족과 탄광촌 주민들은 탄광의 산업전사를 기리는 기념일이 제정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석탄합리화 이후 산업전사 영령의 위패들마저 자리를 찾지 못하고 떠돌고 있다. 함태광업소 순직자 148위의 위패를 모시고 정기적으로 위령제를 올리던 청원사는 그 제례의 전통마저 끊겼다. 위패들이 만덕사로 옮겨가고, 청원사의 소유권마저 변경되면서 함태광업소와 깊은 인연을 맺은 청원사의 정체성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이러한 사례는 사북에서도 발생했다.
사북의 법성사는 동원탄좌 순직광부의 영령을 모시고, 5월 단오 때는 오전 11시부터 12시까지 영가제사를 지냈다. 항장·과장·계장과 유가족이 함께 참여하여 제를 지내던 곳이다. 그런데 동원탄좌가 없어지자 법성사는 일반인에게 매각되었다. 법성사에 있던 순직자의 위패도 사라지고, 절에 있는 불상이나 ‘법성사’라는 현판도 떨어져 나갔다.
사북광업소가 문을 닫고 10년도 안 돼 순직 광부의 영령을 모시던 절마저 문을 닫은 법성사의 모습은 폐광촌의 자화상이다. 탄광은 모두 폐광이 되었어도 ‘석탄산업전사의 날’을 지정해야 하는 당위성은 여기에 있는 것이며, 석탄산업전사의 성지화를 통해 역사 속에서 기려야 할 책무는 국가에 있는 것이다.
성역화라는 공간의 확충과 더불어 ‘석탄산업전사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하여 추모할 수 있는 공식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앞으로는 탄광 순직 혹은 진폐 순직 외에도 퇴직 광부를 위한 위령제도 모색해야 한다. 그것이 가능할 때, 태백이 한국 석탄산업전사의 성지라는 대표성을 지닐 수 있으며, ‘석탄산업전사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승격하는데 명분을 얻을 것이다.
국가가 석탄산업전사의 날이라든가 산업전사 유공자로 지정하기 이전에 탄광지역 7개 시군 혹은 강원도가 나서서 산업전사들을 유공자로 인정하는 작업을 당장 시작해야 한다. 스포츠의 경우 골프·축구·야구 관련 단체에서 명예의 전당을 운영하고 있다. 국가유공자 지정 전에도 탄광지역이 만들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태백의 성역화 공간은 산업전사 명예의 전당 형태로 광부의 영웅적 삶을 영예롭게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전사의 죽음은 그 자체로 영웅 대접을 받는 것처럼, 산업전사 불려졌던 광부는 탄광에서의 재해순직과 직업병을 알고서도 작업을 수행한 진폐재해순직자 모두 산업전사 명예의 전당에 그 삶이 기록되어야 한다. 이런 예우가 갖춰질 때 살아남은 광부와 그 가족이, 또 순직자의 후손이 석탄산업전사의 성지가 된 태백을 찾아올 것이다. 태백은 산업전사와 그 후손이 대대로 찾기를 원하는 성지, 탄광뿐만 아니라 모든 산업에 종사한 노동자들이 본받기 위해 찾아오는 순례지로, 성장하는 학생들의 산업 학습장소로 만들어야 한다.
2) 광부들의 삶 복원하기
태백의 광업소들을 호명하면서, 그곳에 종사하던 광부들의 삶을 복원해야 한다. 자서전 자서전으로는 김정동의 『탄부일기』(눈빛, 2019)를 모범으로 삼을만하다.
직종별 광부 생애구술사 등의 기록을 강화하면서 시설물에 스토리를 넣어야 한다. 선탄부, 채탄부, 굴진부, 운반공, 기계공, 전기공 등의 삶을 기록해야 한다. 박정희 시해 사건에 묻힌 은성광업소는 석탄사에서 최대 인명사고(42명 사망)를 기록하고도 알려지지 않았다.
추모공간을 통한 성역화 작업은 전국 탄광을 대상으로 하면서 탄광 7개 도시를 아우르고, 각 지역의 대표 탄광을 복원하고, 그 탄광에 담긴 스토리를 함께 담아야 한다. 사북의 뿌리관이 사북항쟁 유공자를 기리듯이, 성역화 공간의 건물에는 순직자가 아닌 광부들까지 포함하여 산업전사의 명패를 제작하고 그들의 삶을 기록해야 한다. ‘광업소명이나 근무 기간’ 같은 기록을 통해 광부 모두를 유공자로 기려야 한다.
광부가 가장 많던 1987년에는 전국적으로 68,491명의 탄광 종사자가 있었다. 이 모두를 산업전사 유공자로 예우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현재 진행하는 추모공원 부지와 사업 방식 외에도 지역의 석탄유산 시설을 활용하여 전국의 산업전사 유공자를 새기는 작업을 선행해야 한다. 태백지역에 산재한 모든 유산을 박물관화하고, 성지화하는 것이다.
각 성씨를 다 모은 ‘대전뿌리공원’은 성씨와 족보를 중심으로 효를 강조하며 기획한 장소이다. 태백에서 추진하는 석탄산업전사 성역화 사업은 7개 탄광 도시(강릉 정동진까지 포함하면 8개 도시도 가능)의 모든 도시를 대표하고, 모든 광부를 대상으로 하여야 한다. 이들이 살던 탄광의 흔적을, 탄광촌의 정체성을, 광부의 총체적 삶을 기리는 방향으로 만들어갈 때 성역화 공간은 교육과 추모의 장소가 될 것이다. 현충원이나 호국원 형태보다는 ‘대전뿌리공원’ 같은 곳에서 모델을 찾아야 한다.
태백지역에서는 추모공원을 위한 광부상 건립 제안도 나오는데, 추상적 접근이 아니라 실제 생활했던 사람의 삶을 기리고 선양하는 스토리가 우선될 때 생명력을 얻을 것이다. 광부상이야 강원랜드에도 있는데, 그런 형태보다는 지역의 광부가 겪은 구체적인 일화를 중심으로 접근해야 한다. ‘강아지도 만 원짜리 물고 다녔다’는 허황된 얘기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어떻게 돈을 벌었다는 구체적인 접근이 있어야 한다. 어떤 탄광의 누가 얼마나 벌고, 어떤 일을 했으며, 어떤 사건이 있었고 그 의미는 무엇이며 등 지역의 석탄산업사가 담겨야 한다.
오늘날의 시대를 규정짓는 중요 키워드로 ‘감성’이나 ‘스토리텔링’을 꼽는다. 그런데도 아직 태백의 이야기 발굴이 지지부진하다. 현재 태백의 탄광촌 이야기를 담은 책으로는 홍춘봉의 『탄광촌 공화국』(노동일보, 2002)이나 정연수의 『탄광촌 풍속 이야기』(북코리아, 2010), 전미영의 『살아오라 그대, 노동해방의 불꽃으로!』(성완희 기념사업회, 2017) 등 몇 권을 빼고 나면 인근 삼척이나 정선의 간행물에 비해 부족한 편이다. 탄광 종사자들이 태백 지역을 더 떠나기 전에 태백탄광촌의 이야기를 완성하려는 저술 작업을 통해 지역의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
예컨대, 1982년 황지광업소 하청 태백탄광에서 발생한 물통사고는 한국의 탄광사고 중에서도 손꼽히는 사고였다. 4명의 광부가 지하 250m의 막장에 갇혀 동발로 사용하던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으면서 버텼다. 배대창(당시 41세), 김기전(39), 전재운(49), 송신광씨(39) 등 4명의 광부가 사고 15일 만인 9월 3일 기적적으로 살아서 구조되었다. 우리나라 석탄산업사의 최장시간 매몰 기록이다.
이러한 광부의 삶을 기술해야하고, 광부의 옷을 진열할 때는 광부 ○○○의 스토리를 지닌 ‘○○○ 산업전사의 옷/작업도구’ 식으로 진열해야 한다. 함태체험공원에 전시한 출처를 알 수 없는 무수한 작업복과 도구처럼 단순 나열 형태가 아니라, 어떤 스토리를 지닌 광부의 작업복이자 작업 도구 형태로 전시할 때 감동을 전할 수 있다. 광부의 생애 구술사를 만들지 않으면, 광부들이 사용하던 물건이 아무리 많아 봐야 ‘스토리텔링’을 통한 감동과는 거리가 멀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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