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세의 노병은 다시 학생이 된다”
6월이다. 6월은 호국 보훈의 달이다. 해마다 이때쯤이면 나라를 위해 온몸을 던져 자신을 희생한 분들을 기리게 된다. 이들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다. 지금도 나라를 위해 온몸을 던지고 있는 경찰과 소방, 군인들, 저 멀리 해외 및 망망대해에서 조업하며 물품을 배와 비행기에 싣고 우리나라로 들어오는 이들, 남극기지, 조국의 바다와 방공망을 지키는 이들. 수없이 많다. 내일의 평화를 위해 오늘도 땀흘리는 우리 학생들도 내일의 산업역군이자 군인, 경찰, 소방대원들이다.
우리 태백시에는 태백중학교가 있다. 태백중학교에 대해서는 단체탐방으로 소개한 바 있어 생략하며 이 가운데 과거 1950년대 우리 학생들이 나라의 국란(國亂)인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종이와 펜 대신 총을 들어 전쟁터로 달려간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127명의 태백중학교 학도병 중대 대원들 중 아직 생존해 계신 이용연 화백회 회장을 태백중학교 학도병 기념관에서 만나 과거 참혹했고 긴박했던 시절을 듣는 시간을 가졌다. 또한 오늘날까지 이루고 싶은 일들을 이 글에 담았다.
오늘 6.25전쟁 73주년을 맞아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의 비극이 없기를 바라면서...
아래는 이용연 회장님이 전하는 1950년과 1951년 한국전쟁 당시를 글로써 스케치 했다. 그리고 이회장님의 시점으로 풀었다.
나는 학도병 이용연입니다.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의 기억으로 돌아가 여러분과 함께 지난 시간을 회고하며, 이용연 학도병의 시간을 증언 하고자 합니다.
나는 1933년 1월10일 평창군 평창읍 약수리 33번지에서 5남2녀중 2째로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께서 평창강을 막는 공사를 하다가 소실되는 바람에 경제적으로 궁지에 몰려 태백의 광산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게 되었는데 할아버지를 따라와 제2의 고향인 태백에서 4살 때 들어와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장성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과정을 마치고 4년 과정인 태백중학교에 입학한 저는 나름 자부심과 긍지로 학교생활을 하던중 16세 되던 해에 안타깝게도 1950년 6월25일 새벽4시 평화롭던 일요일 새벽, 시민들을 깨우는 포탄소리와 함께 비극의 시작 전쟁이 일어나는 6.25 동족상잔의 비극을 맞게 되었습니다.
노동절과 국회의원 선거등으로 느슨해진 국군의 경계태세를 틈타 기습공격을 개시한 북한군을 우리는 잊지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남북 군사 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포화가 집중되었으며 김포공항을 폭격하고 19만8천여명의 북한군이 2200여종의 각종포와 230여대의 전차가 제일선에 투입되어 동족상잔의 전쟁의 서막이 오른 것 입니다.
전쟁이 시작 된지 6개월이 지난 1951년 1월 9일 태백중학교 3학년 16세의 어린나이로 저는 친구들과 학도병에 지원하게 되어 전쟁터로 가게 되었습니다. 학도병에 지원하여 육군본부가 있던 울산에 목적지를 두고 떠나던 날 너무도 많은 눈이 내렸고 추운 날씨에 손발이 동상에 걸렸던 기억이 오늘도 또렷이 기억납니다.
다시, 전쟁 당시 태백의 풍경을 전합니다.
6.25사변이 나서 장성읍내의 일부사람 들이 남쪽으로 피난을 가고 일부는 남아 있었는데 빨갱이들이 태백 골짜기 까지 들어와 북한 의용군으로 젊은 사람을 잡아가는 실정이라 낮에는 산에 가서 숨어있었고 밤이면 집으로 돌아와 목숨을 부지하던 중 하루는 친구가 북한 의용군으로 붙잡혀갔다는 소식과 함께 총 맞은 인민군을 장성병원에다 몰래 데려다 놓고 가는 인민군도 있었다고 합니다.
더욱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서울이 침탈당하자 더 이상 물러 설곳이 없다고 판단한 학생들은 학도병으로 지원하기 시작할 즈음에 태백지역에서는 부상을 당한 인민군도 행패를 부릴 지경의 전쟁 상황이다 보니 젊은 혈기에 피가 거꾸로 솟구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랬습니다.
저와 저의 친구들 10여명은 함께 모여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이렇게 숨어 다닐 것이 아니라 학도병으로 나가자는 약속과 함께 다음날 5시에 모여서 출발하자고 약속을 했습니다. 다음날 출발장소에 도착하니 10명이 아닌 127명의 모여서 출발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127명의 우리 친구들은 학생복을 군복으로 하소 전쟁터로 달려가게 된 것입니다.
태백중학교 1학년부터 4학년으로 구성된 학도병 123명, 타교생 3명이 가려고 하던중 박효칠 선생님이 학생이 가는데 나도 가야한다며 합류하여 인솔교사를 포함한 127명이 학도병으로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군복도 없고 군번도 없는 그냥 학도병이란 이름으로 전선으로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군복도 없이 태백중학교 학생교복이 군복이었습니다. 경북 춘양의 3사단 23연대로 향했고 학도병 1개 중대로 편성되었습니다.
그래도 훈련은 해야 했습니다.
학생복을 입고 총을 들고 실탄을 장전하고 총 쏘는 것을 4일간 배우고 경북 봉화의 녹전 첫 전투에 임했습니다. 밤에도 전투가 벌어지다보니 아침에 냇가에 나가면 밤에 전사한 시체가 많이 보였고, 첫 번째 전투에서 송길상 이란 친구가 처음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친구의 죽음을 보니 학도병들의 가슴에선 적개심으로 불타 올랐고 나라를 살려야 한다는 일념이 더 확고해졌습니다.
127명의 3사단 23연대 태백중학교 학도병은 전시 중 중공군에 포위된 병력을 구출했으며 간성 쑥고개전투, 양구해안 가칠봉전투, 김화지구 전투 등에 참여하여 214, 748, 949고지를 탈환 하는등 원주, 문막, 제천, 평창, 등의 전투에서도 공을 세웠습니다.
가칠봉 전투에서는 무명고지를 탈환하라는 임명을 받고 5군단 병사들과 교대하여 전투에 참여하여 치열하게 전투에 임하였으며, 인제군 현리에서 벌어진 현리 전투는 최악의 전투로 꼽히며 중공군에 포위된 3군단 병력을 3시간 전투끝에 구해내는 활약하며 최전선에서 목숨을 걸고 중공군과 맞서 싸운 태백학도병은 정선아우라지로 돌아와 군을 재정비하여 양양 38선을 돌파 할 수 있었던 전투가 유달리 기억에 남습니다.
그렇게 교복을 입고 참전했던 이들은 일부 친구들은 전쟁터에서 산화했고 남은 이들은 다시 학교로 돌아왔습니다.
1953년 9월20일 전쟁이 끝나고 태백중학교 학도병들은 학교로 돌아와 전사한 18명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화랑도의 “화”와 태백의 “백”을 따서 ‘화백회’라고 이름을 짓고 화백회는 18명의 전사영령들을 위해 지속적으로 모여 애국정신과 충혼을 기려 위령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제 살아있는 노병은 10명이 전국에 생존해 있고 태백에는 현재 저를 비롯해 2명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이용연 회장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당시의 회상 SCINE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들은 자신이 전국을 다니며 학생들과 국민들에게 ‘학도병 이용연’으로 강연하며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없기를 바라고 있다.
이용연 회장은 또한 아직도 남아 있는 학도병들의 숙원사업들을 꺼낸다.
먼저, 태백중학교 내에 있는 기념관 운영 문제다. 학교내에 위치해 있어 관리비용도 학교에서 지출된다. 현재 승강기가 고장나고 물이 새며 내부 수리를 하려고 해도 적은 예산으로 유지하기에는 어렵다고 한다.
현재 태백중학교가 남녀 공학으로 통합되고 현재 장성여중 부지에서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으며 내년부터는 현재 공사중인 부지 위에서 새로운 시설의 교사에서 공부하게 된다. 하지만 전국에서도 힌 곳 뿐인 학도병 기념관에 대한 관리유지 방안은 그대로 남는다.
그리고 김혁동 전 의원은 강원도의원 재직시 ‘학도병 선양교육지원 조례’를 대표발의하여, 태백중 학도병이 조국을 위한 헌신을 기억하고 학생들에게 나라사랑과 역사의식을 전달하고자 했으나 조례안 제정됐을 뿐 아직 세부사항 등은 시행되지 않고 있다. 더욱이 우리 학도병들은 다른 지역의 참전학도병들과 달리 유공자로 지정되지 못해 아직도 입법마련을 위해 뛰고 있다고 한다.
이용연 회장은 인터뷰를 마치며
친구들을 위한 시(詩로) 이들을 위로한다.
나이는 90세를 넘었지만 그는 학생의 신분으로
기념관에서 그들과 조우하고 있었다.
오늘 90세의 이 노병은 먼저 간 전우를 그려봅니다.
구천길 강행군에
16살의 어린몸 지쳐있고
빈수저 입에 물며
배고파 겉보리 볶아먹고
업드려 뻗쳐 하는 모진 기합
원망도 많았것만 도처에 오랑캐 물리친
열여덟 호동들아!
지금 어느 산골짝 이에 홀로 외로이 누워 있는가?
먼저 간 그대들의 이야기가 목 메이고 울먹여 지네!
화백회를 함께하고 먼저간 전우들이여!
오늘따라 그대들이 생각이 나는구료!
편히들 쉬게나 전우들이여!
다시 한번 그대들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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