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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뉴스가 만난 사람

21 박종기 前태백시장 정감록의 고향처럼 살리고 싶은 태백

아이뉴스가 만난 사람 5월6일 창간 14주년 기념호에는 만나고 싶었고 이야기거리가 많은 박종기 前태백시장이다. 아아뉴스가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일반인들 지역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인물들을 조명하고 있었다. 가장 계급장이 높았던 분이 금숙자 회장이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이번에는 눈을 돌렸다. 정치에서 물러나 초야에 묻혀 있으면서도 지역주민과 함께하는 인물들 중 하루가 바쁜 분이다. 바로 박종기 前태백시장이다. 새벽에 일어나 오전엔 걷기 운동을 즐길다. 40리길 이라 한다. 16km쯤. 오후에 지인들과 스포츠를 즐기고 간단한 약주로 저녁을 보낸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그간의 걸어왔고 경험했던 것들을 차곡차곡 정리해놓고 기록하고 있다고 전한다.

 

박 前시장을 어린이날 전 날인 4일 오전 문곡소도동의 커피숍에서 만났다. 통화전 기자는 현안이나 오투리조트 등 여러 가지 정치적인 이슈 등을 제외한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후배 공무원들에게 전하고 싶고 시민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들로 채워주었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인터뷰를 요청했다. 하지만 인터뷰 도중 그는 현안도 풀어냈다. 그리고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공무원을, 그것도 공직생활을 마감하고 칠순이 넘어 이제 쉬면서 인생을 즐기시는 분께 인터뷰 요청한 것도 실례였지만 그는 마다하지 않았고 오히려 반갑다며 많은 이야기들을 전해주었다.

 

그가 태백에 온 시기는 1964년이며 공직생활을 시작한 곳은 바로 삼척군 장성읍이었으며 그 때가 1967년이다. 16세에 태백에 왔고, 19세에 공직생활을 시작해 62세에 시장까지 하고 퇴임했으니 모든 것은 다 이루었다고 그는 전한다.

 

“삼척군 장성에 처음 왔을 때 ‘이런 곳이 있었나’하고 놀라워했다. 장성초등학교 학생들이 피아노 경연대회를 했었으니 말이지. 전국 어느 곳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풍족함이 있었던 반면, 이에 따른 미비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어요”

 

그 중 하나가 바로 광산의 가동으로 인한 안전사고가 계속됐으며 인명피해였다. 특히 부상보다 사망사고에 따른 망자(亡者)처리였다. 당시는 무덤이나 재해에 따른 처리여부가 불명확해서 화장(火葬)을 해서 처리하는 곳이 있었다. 태백(황지와 장성, 철암 등)에는 5곳이 있었는데 각 광산에서 사고로 숨진 이들을 화장하는 곳이 정해져 있어 이곳에서 처리되었다고 한다.

 

화장방법도 우리가 아는 그러한 방법이 아닌 폐유를 뿌리고 장작을 태워 처리하는 것이었는데 그중 한 곳이 고원3구장 인근 화장장이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조례나 공식화장장이 없었다. 그래서 박 前 시장이 27세 되던 해에 사회계장을 맡았었는데 이도 젊은 나이에 맡은 것이었다. 위쪽 화장장에서는 죽은사람이 태워지고 아래쪽에서는 하천변에서 고기를 구워먹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그리고 죽은 아이들의 시신도 이따금씩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러한 어려운 상황을 안 젊은 박종기 계장은 단속을 해야 했으며 이같은 실정을 알고는 화장시설을 도입키로 하고 자료를 수집하고 일본서 구입한 t설계도로 화장시설을 설치, 강원도 최초로 조례를 제정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만든 것이 태백화장장이다.


일화도 있다. 화장장이 준공되고 시험 가동시 삼척군수를 참석토록 해야했으며 새벽에 전화를 했던 것. 군수가 문곡 화장장에 도착시 차가 구르는 사고가 났었고 공사가 미비해 연소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 화장장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관계로 미군부대 발전기 등을 사용하고 남은 폐기물을 이용해 돌릴 수 밖에 없었던 사연도 전해주었다.

 

“평생 잊지 못한 일이 있었는데 젊은 여자분이 소복을 입고 죽었는데 그 모습이 웃는 모습이었다. 평안하면서도 묘하고 잊지 못할 기억이었다 생각한다”고 전한다. 또한 화장관련 공부를 하러 강릉 홍제동 화장장까지 출장가야 했던 일 등을 전했다.

 

그리고 그는 화장장 담당은 망자를 태울 때면 시간이 많이 걸려 텃밭에 감자 등을 심는 등 농사도 짖고 살아 아들 대학교까지 보냈다고.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도 테니스를 할 수 있었던 박 前시장은 장성여고의 테니스코치도 하는 등 태백에 테니스보급에도 앞장섰고 업무 1시간 전에 출근하는 등 열성적이었다. 당시 테니스를 칠 수 있었던 사람들도 대부분 요직에 있었던 사람들이었으니까. 지금의 골프와도 같은.

 

부인이 삼척군청 탁구선수 였던 만큼 박 前시장 집에서 하숙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것이 인연이 되었다고 한다.

 

1981년 태백시 개청당시에도 박 前시장은 큰 역할을 했다. 바로 태백시 설치준비단 단장을 맡게 된 것이다. 황지 장성읍이 합쳐 시가 되니까 막상 간부급 공무원이 부족해 단장까지 맡게 됐고 그런 박 전 시장의 경함과 노력이 2006년 전국동시지방선거에 출마, 당선돼 시장까지 하게 됐다.

 

석탄박물관의 탄생배경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광산과장재직시 석탄산업합리화조치로 많은 광산이 폐광이 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이를 보존하고 후세에 교육의 장으로 삼아야겠다고 결심, 문화관광과 사업으로 추진하려니 사업비가 너무 많이 소요돼 하는수 없이 산업자원부에 요청하기에 이른다. 이에 그는 산자부 담당관에 박물관건립을 요청하니 담당업무가 아니란 이유로 거절당했다고. 이에 박종기 과장은 국가에너지 정책의 갑작스런 전환으로 에측못한 일이 발생했으니 업무적 착오아닌가. 오죽하면 이렇게 왔겠는가. 이에따른 후속방안이 있어야 한다고 호소했던 일도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런 젊은 과장의 아이디어가 담당공무원의 머릿속에 각인됐고 그 공무원의 고향에도 박물관이 지어졌다고 전해진다.

 

박 前시장은 시장재직시 가장 많은 사업을 추진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물론 이에따른 결과로 오투리조트가 민간에 헐값에 매각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전국 어느 지방자치단체장 중에서도 안전체험관과 오투리조트, 이에 대비한 시유지매입, 장성여고 황지고 기숙사 운영, 그리고 시장전 공무원 재직시에도 공설화장장 조례제정 및 설치와 석탄박물관 설치 등이 있었다.

 

“안전체험관도 체험관 하나로는 부족해 철암에 김진선 지사를 설득해 강원소방학교를 설치하고 이곳에서 전국의 소방공무원들이 교육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고 했다”고 전한다. 그렇게 강원도소방학교가 탄생했다. 이와는 좀 다른 것이지만 ‘바람의 언덕’ 이라는 이름도 박 시장 재직시 지어졌다.

 

박 前시장은 두 번의 편지를 작성해 공무원들에 전했다. 그 첫 번째가 부시장 재직시였으며 두 번째가 바로 시장 퇴임시다. 그는 공무원들에게 “절골을 돌아보니 사람들이 고기를 잡고 있었고, 소방서앞 황지천에는 원앙이 보였다. 그 어려웠던 시절 검은 도시 태백이 이렇게 변한 것은 바로 공무원 여러분들의 노력으로 이뤄진 것이 아닌가 한다”고 고마움을 표시했다고 전했다.

 

제44회 강원도민체전 태백유치와 관련해서도 전했다. 그는 당시 원주에 유치될 예정이었는데 태백으로 유치운동을 벌여 이뤄냈고, 장성근로자복지관도 일단 태백에 유치 후 장성으로 이전한 것, 태백국민체육센터 설치, 게임의 도시 태백을 위한 성화대 오투리조트에 설치도 기억난다고 전한다.

 

황지자유시장의 현대화사업도 주상복합으로 추진하려했으나 좌초됐던 아픈 경험도 있었다. 이 내용은 단체탐방에서 언급됐던 것으로 아직도 박 前시장은 현대화사업은 진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입구에 소방차가 들어갈 수 없게 조형물을 설치한 것에 우려를 나타냈다.

 

박 前 시장과 대화가 끊이지 않아 자리를 옮길 수 밖에 없었고 오후에도 계속됐다. 그만큼 길었다. 하지만 많은 글을 담을 수는 없어 줄이고 줄였으며 마무리를 할 수 밖에 없다.

 

행정구역 개편시 장기적으로는 강원랜드를 중심으로 한 폐광지역 행정구역 추진에도 힘을 쏟았고 서학골에 이팝나무를 식재해 300년 후 멋진 가로수로 거듭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박 前 시장은 지금도 할 일이 많다고 한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정리하며 쉬지 않는다. 태백시 개청 40주년을 맞아 현 시장에 전해줄 것이 많다고도 했다.

 

“시장직을 내려놓았다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처음 태백에 와서 느꼈던 것처럼 정감록의 고향처럼 살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칠순의 前태백시장은 계급장을 내려놓고 인생의 황혼기를 맞이했지만 아직도 할 일이 많다며 또 다른 행선지로 향한다. 그리고 후배들에게 전해줄 내용이 많은 듯 바쁜 걸음을 한다.

 

인생을 마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각자의 할 일이 있듯 분명 태백이 정감록의 고향처럼 이상향이 되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