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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인터뷰·칼럼

기고- 정연수 탄전문화연구소장 7 탄광촌 실정과 광부의 노동 현실(하)

우리나라 직종 중에서 광부만큼 별명을 많이 가진 직업도 없을 것이다. 마지막에 선택하는 기피직종이었으나, 경제적 소외층이 애국하는 마음으로 고향을 등지고 탄광촌으로 들어온 광부들이었다. 3년만, 5년만 열심히 일해서 돈 벌어 떠나겠다는 마음으로 들어왔다가 영영 못 떠난 광부들이기도 했다

 

탄광촌의 호황을 가리키는 유행어로 널리 알려진 ‘탄광촌에서는 강아지도 만 원짜리 물고 다닌다’는 말이 있다. ‘3년만 일하고 탄광 떠나겠다’거나, ‘내 아들은 광부 만들지 않겠다’는 말과 같은 거짓말이다.

 

실상은 2대 광부, 3대 광부로 대물림되는 것이 탄광촌의 현실이었다. 탄광촌 호황기에도 탄광경영자이거나 매탄업자, 술집과 쌀집 등 일부 상권만 부를 축적했을 뿐 광부의 가족은 퇴직할 때까지 여전히 가난했다. 진폐증이나

 

탄광 사고로 인한 병원비 증가라는 요인 외에도 탄광촌의 일상이던 ‘맞장부’ 점포와 구매자가 각각 갖는 매출 매입 장부같은 외상은 비싼 물가와 적자가계의 악순환을 가져오면서 가난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탄광촌의 대다수 구성원을 차지하는 광부와 그 가족은 두 달 미뤄 지급하는 탄광의 월급 방식으로 인해 고리채에 시달리기도 했다. 태백지역의 성공한 금융기관으로 정착한 한마음신협이 1977년 설립 배경으로 탄광촌 주민의 고리채 청산을 내세운 것을 보면 당시 실정을 짐작할 수 있다.

 

광부들은 자신의 자식만큼은 광부로 만들지 않겠다는 의욕을 품기도 했지만, 탄광노동력 확보에 혈안이 된 국가의 기획에 의해 그 꿈은 무산되었다. 석탄증산이 시급한 국가와 기업은 당근(야간 통행 금지 예외, 예비군 면제)과 채찍(막장교대, 고속굴진, 생산 목표량 달성)으로 광부들을 몰아세웠다.

 

부족한 노동력 확보를 위해 사택 제공, 군 면제, 학자금 지급, 인력 소개 수당 지급 등의 유인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대도시로부터의 노동력 유인책 외에도 국가가 나서서 광부의 아들을 광부로 육성할 계획을 세웠다.

 

탄광촌 지역마다 공업계 고등학교를 신설하고, 공고 육성 방안을 통해 탄광 기능인을 육성하고 나섰다. 태백의 태백공고, 삼척의 삼척공고와 도계실업고, 영월의 영월공고, 정선의 함백공고 등에 광산과를 신설하여 인력 수급을 담당했다. 강원도 내 대표적인 탄광촌마다 공업고등학교를 설립하고 광산과를 개설하면서 광부의 자녀가 자연스럽게 광부가 되는 길을 열었다.

 

탄광촌의 공고로 진학한 상당수 학생 역시 광부의 아들이었으니 학교를 통해 광부 대물림을 조장한 셈이다. 같은 광업소에 함께 근무하는 2대 광부도 흔했다.

 

탄광촌의 공업고등학교만으로는 부족한 광부 인력을 충당할 수 없자 정부와 탄광업계가 공동 기금을 투자하여 충북 제천에다 한국광산공고를 설립하기까지 했다. 1980년 개교한 한국광산공고는 채광과·선광과·광산토목과·광산기전과 등 4개 과에서 매년 240명의 기능인을 배출해 탄광과 일반광산으로 공급했다.

 

외부 사회는 산업화 흐름을 타고 선진기술을 습득하였으며, 1971년에 이미 컴퓨터를 대비한 ‘전국 상·공고 교사’의 전산교육까지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 변화에 비춰보면 탄광촌 사회는 거꾸로 가고 있었으며, 정보가 제한된 광부 사택촌에서 살아가는 탄광촌 주민은 세상의 변화를 따라갈 수 없었다.

 

국가가 내세운 공업계 육성이라는 구호가 탄광촌에서는 광부 인력확보를 위한 수사에 지나지 않았다. 1976년에 태백공고에서 기계공업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는 승격 같은 조치 역시 광부 인력을 제일 많이 요구하는 태백탄광촌의 노동력 확보와 맥락을 같이한다.

 

사택에 나붙은 ‘우리는 산업전사 보람에 산다’ 같은 구호나 태백기계공고 정문의 ‘기술인은 조국 근대화의 기수’라는 글자를 새긴 대형 조형탑은 ‘탄광노동-애국’을 일체화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조국 근대화의 기수’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실습에 전념하던 공고생의 자부심은 광업소에 입사하여 ‘산업전사’의 자부심으로 진화했다.

 

1970년대 정부와 언론이 사용하던 ‘광공업 발전’이란 용어에서도 알 수 있듯, 탄광업은 모든 공업의 선두에 있었다. 석탄에너지 없이 공업발전이 불가능한 시대적 배경을 증거하는 것이기도 하다. 산업전사의 자부심은 맹목적이거나 추상적인 것만이 아니라, 국가의 광공업 발전에 기여한다는 구체적인 실체였다.

 

탄광에서 5년간 재직하고 군면제를 받는 병역특례 정책 역시 젊은 노동력의 유인책이었다. 병역특례 시책은 숙련공을 탄광에 오래도록 붙잡아두는 효과를 거두었다. 산업화가 급속히 이뤄지는 시기에 탄광업체에서 5년 동안 근무를 하고 나면 다른 산업체로 옮겨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가 교육제도를 통해 광부를 양성하고, 국가가 나서서 ‘조국 근대화의 기수-산업전사-증산보국-광공업 발전’ 등의 이데올로기를 광부에게 내면화시켰다.

 

그러고도 광부가 필요 없어진 1989년, 예고도 없이 석탄합리화를 시행하면서 광부들을 실직으로 내몰았다. 산업전사라고 추켜세우던 광부를 폐광정책 속에 폐기처분한 주체가 국가였으니, 전사에 대한 예우와 보상은 마땅히 국가가 책임져야 할 일이다.<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