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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뉴스가 만난 사람

26 정태화 길거리아트 대표

태백시내 곳곳에 아름다움과 봉사 심는다

2021년 12월의 끝자락이다.

 

2년 6개월 여 전 첫 번째 ‘아이뉴스가 만난 사람’ 첫 보도 이후 많은 사람들이 언론을 통해 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스물다섯번째 인물로 김형주 태백시재향군인회 사무국장 겸 자율방재단장을 소개한 뒤 3개월여가 지났다. 지난추석 이후 26번째 인물을 모시지 못하다가 이번에 그의 활동을 소개하게 됐다.

 

정태화(63세) 길거리아트 대표는 현재 고정적인 직업을 갖지 않고 있다. 하지만 언론에 모시기가 너무 어려운 만큼 하루 생활이 바쁘게 가는 분이다. 오전엔 도시락 배달을 하고 오후에는 태백시내 곳곳을 누비며 어두운 골목을 그림으로 환하게 바꾸는 작업을 하고 있어서 그러하다.

 

겉으로 보았던 정태화의 모습보다 인터뷰를 마치고 다시 본 그의 모습을 보았을 때 기자의 마음 속 한 켠에는 쓰리고 멍 함이 내재돼 있게 됐다. 그리고 글로 표현해 내면서 조심스럽게 그의 모습을 그려내기로 했다. 그만큼 굴곡지고 거칠었던 인생이 투영돼서 그러했다. 타임머쉰을 타고 과거로 빠져든다.

 

태백출신이며 태백기계공고를 졸업했다. 그리고 강원관광대 조리학과를 전공했으며 광업소를 다녔고 장애인협회 회원이면서 지역의 봉사활동 참여에 마다하지 않는 분이다. 봉사활동을 위해 항상 그의 옷은 흙먼지가 날리고 평범함을 풍기고 있다. 편하게 만날 수 있는 분이지만 그렇다고 약속을 하고 만나기가 쉬운 분은 아니다.

 

첫 번째 그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던 바르게살기 태백시협의회 소속때 이야기를 담아보았다. 기자가 그를 처음 만났던 것도 그 단체에서 부회장으로 있을 때 였으니까.

 

30대 청년때 장성시내에서 사회정화위원회 회원으로 활동했었다고 한다. ‘서울의 봄’이라고도 알고 있는 80년대 였으니 신군부의 정권이 정부를 이끌어갈 당시였으며 사회안정과 경제발전에 매진하고 있었을 때였으니 정부는 이러한 단체를 통해 사회를 깨끗하고 맑게 정화하고자 캠페인을 벌이고 활동을 하던 시기였다고 보면 된다.

 

바르게살기 회원으로 임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바르게실기’라는 단체가 사회정화원회의 전신(前身)임은 많은 국민들이 알고 있다. 여기서 잠시 도서관으로 들어가보았다.

 

사회정화위원회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대체기구로 등장했으며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 초 13대 국회(1989년2월)에서 사회정화위원회의 작동기제이자 지원체계인 사회정화운동조직육성법을 폐지시켰으나, 1989년 4월 사회정화위원회의 조직과 인원을 흡수해 ‘민간단체’로 발족시킨 것이 지금의 ‘바르게살기운동중앙협의회’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태화 대표는 그렇게 바르게살기운동 협의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알려졌고 그의 인생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그리고 봉사활동은 그의 몸 속에서 피어나고 있었다. 그의 인생에서 또 한 부분을 차지한 것이 바로 광부였다. 광부의 삶은 그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하며 지금의 진폐단체 활동과 관계가 있다.

 

정태화 대표는 ‘광부’라는 직업군 중에서도 그의 친구가 광맥을 찾아내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어서 그와 함께하는 삶이 많았다고 햇다. 특히 탄(석탄)을 찾아내는 기술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광업소에서도 모셔오는 기술인력이기도 했다. 그래서 여러 광업소를 다니면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탄도 많은 양이 땅 속에 있어야 하지만 탄질도 좋아야 하기 때문에 전문지식이 됐고 광업소의 핵심 인력이기도 했다.

 

정태화 대표는 그 때 함태광업소와 인연이 되어 89년에 입사했으며 93년까지 근무했다. 기술도 기술이지만 이후의 광업소는 석탄산업합리화로 사양산업으로 바뀌었고 더 활발한 활동을 하지 못하고 전업을 고민하기에 이른다. 함태광업소에서의 인연은 지금도 같이 일했던 몇몇분이 현재도 만나면서 옛날을 회상하기도 한다. 그렇게 현재의 진폐단체와의 연은 계속되고 있었다.

 

노점상이라는 것이 있다. 기자가 몰랐던 부분이다. 하지만 정태화 대표의 인생을 바꾸어 놓을 만한 일들이 많았던 곳이 여기였다고 한다. 전국을 다니다보면 여러 일들이 많이 발생한다. 집을 짓거나 건물을 임대해 간판을 내고 판매를 하는 상인이 아닌, 전국의 장터를 돌며 물건을 판매하는 기술이 하루아침에 쌓여지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판매기술이며 노하우다.

 

외지노점상은 지역 토박이들이나 조직폭력배들에게는 항상 골칫거리였고 곱지 않은 상인들로 보이기 마련이었다. 외지상인들이라 하며 천대받았고 얻어 맞기도 했던 시절도 있었으며 남은 것은 온 몸의 멍자국 뿐이었으니 말이다.

 

태백에서도 축제를 개최하면 야시장을 열게 되며 외지 상인들이 모여 축제장 입구에 상가를 형성, 판매를 하는 반짝 상가(일명 도깨비시장)들을 볼 수 있다. 정태화 대표는 그러한 직업을 갖고 있어서 전국의 5일장이나 민속장터, 아파트내 반짝시장, 축제장을 다니면서 화장품 등을 팔기 시작했고 강원도지역에서는 그의 손을 거쳐 판매장을 구성하고 영업한다고 한다. 축제장 야시장에는 각 지역별로 대표자를 통해 노점을 꾸리는데 정태화 대표가 바로 강원지역 대표자였다.

 

그렇게 해서 그 많던 빚(부채)을 해결할 수 있었고 그의 인생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할 수 있었다. 아내는 별도의 상가를 운영하지 않고 현재 5일장에서 상품을 판매한다고 한다.

 

이제 그의 변화된 모습이다. 정태화 대표가 왜 장애인단체와 인연이 되었는지는 2007년 찾아온 패혈증이 원인이다. 그렇게 앓은 병은 5일간 사경을 헤맸다.

 

“제 인생에서 터닝포이트 였죠. 지금의 나를 있게 했으며 제2의 인생을 살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7차례의 대수술을 끝에 깨어났지만 장애자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3개월간 마음고생을 했으며 살아 있음에 감사드리고 보답으로 봉사활동에 전념하게 된 것이라 한다.

 

그의 노력이 태백시민대상으로 다가왔다. 2018년 태백시는 지역개발 부문 수상자로 정태화씨는 수상당시 바르게살기운동태백시협의회 수석부회장으로써 태백사랑 희망나누기 밑반찬 전달과 사랑의 김치 나눔, 연탄기금 조성 등 다양한 봉사활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했으며, 진폐환자들의 복지향상을 위한 투쟁에도 앞장서는 등 지역사회 발전에 이바지 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길거리아트가 태백시내는 종횡무진한다. 낮은 연립주택의 담장에 폐타이어를 활용해 화분대를 만들어 꽃을 심고, 보건소 입구 도로변에 실외인테리어를 꾸며 시내를 흑백에서 컬러로 바꾸어 놓고 있다.

 

박치형 작가(관동대 미대출신)의 도움으로 길거리아트를 창립했고 그의 멋진 그림솜씨가 거기에서 탄생됐다. 2B야 소묘동아리 활동에도 열성이다. 지난 여름초 태백중학교 교정에서 열린 학도병 추모제에 참석한 뒤 이들 학도병에게 드릴만한 기념물을 구상하다가 이분들의 사진을 배경으로 소묘를 이용한 그림을 그려 기증하기로 하고 작업에 들어갔으며 지난달 11월21일 한마음신협과 시청 로비 문화광장에서 열린 ‘잊혀진 전쟁영웅들, 그림으로 모셔오다’의 6.25참전 태백중학교 학도병 소묘전시는 많은 심금을 울렸다.

 

최근에는 코로나19로 많은 시민들과 태백을 찾는 방문객들이 보건소를 찾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보건소입구 도로변에 지저분해지고 낡아 깨끗한 미관 차원에서 벽화 및 인테리어 작업을 마쳤다. 보건소 금연홍보 벽화다 동아리 회원들이 힘을 보탰고 박치형 작가의 지휘로 어렵지 않게 마칠 수 있었다.

 

장애인단체인 지체장애인협회 태백시지회(지회장 천정숙) 회원으로 출전해 받은 상도 있다. 2B야 소묘동아리회 정태화씨는 지난 6월 29일과 30일 춘천기계공고에서 열린 강원도장애인기능경기대회에서 수채화부문에 출전해 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장애인단체 소속으로 출전해 이렇게 값진 상은 기억에 남으리라 사료된다.

 

그의 일상은 이렇게 시계처럼 하루를 지나간다.

 

집에는 처가 식구들과 함께 지낸다고 한다. 외조모와 장인 장모와 함께 가족이 지내는데 핵가족화 시대에 귀감이 된다. 나이드신 어르신들을 모시고 사는 것이 여간 힘들지 않기 때문이다.

 

굴곡진 삶 속에 아름다운 모습은 환히 웃는 정태화 대표를 더욱 빛나게 한다. 장애인단체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마치면서 복도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언제나 밝은 모습의 정태화 대표를 보면서 어쩌면 태백의 모습이 바로 이런 역사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앞으로 정대표가 꽃길만 걸으시길 바라면서 끝으로 그의 좌우명을 그리기로 했다.

 

“맑은 눈으로 살아가는 주변들과 기습으로 느끼고 어울림하는 아름다운 인생길을 동행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