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팔고개와 흰두리마을 그리고 돌꾸지
본지 태백정선인터넷뉴스 2022년 5대 기획 가운데 두 번째 주제인 광산지역 문화재 탐방 ‘강원남부 탄광문화유산을 찾아서’를 연재한다. 올해 태백정선인터넷뉴스 특별기획은 ‘산업전사의 고향에 빛을’ 이라는 슬로건으로 과거 석탄산업의 중심지였던 태백과 정선 도계와 영월 등 광산지역 문화재 등을 발굴 보존하는 캠페인으로 전개한다.
음력 정월 대보름을 지나 강원탄광과 강원탄광의 흔적이 남아 있는 흰두리마을과 나팔고개, 돌구지마을 일대를 찾았다.우리나라에서 큰 기업으로 성장했으며 현재는 흔적만 남은 강원탄광의 위령탑인 순직자위령비와 돌구지마을 등을 탐방하게 됐다. 마을 지명과 역사 유래는 2014년 태백문화원에서 발간한 김강산 著의 ‘태백시지명지’를 참고했다.
강원탄광의 역사
탐방에 앞서 강원탄광에 대한 사료들을 찾아보았으나 많은 부분이 남아 있지 않았다. 물론 강원탄광은 현재 공공기관인 한국광해광업공단(구, 석탄산업합리화사업단)에서 찾을 수 있다. 백과사전에는 현대제철(당시 인천제철)이 2000년 3월 강원산업 주식회사를 인수했다고 되어 있다.
또한 강원탄광에 대해서는 본지 태백정선인터넷뉴스가 지난해부터 보도한 [2021년 기획특집] ‘광부의 희망 꿈을 찾아서’ 연재와 정연수 탄전문화연구소장이 지난해 2차례에 걸쳐 주제발표한 내용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강원산업은 1952년에 강원탄광으로 설립된, 석탄 채굴·가공과 연탄제조·판매 및 산업용 기계·주물 등을 생산하였던 기업체로 가족회사로 출범, 1960년 12월에는 주식회사 강원탄광으로 개편했으며, 1963년 8월에는 서울근교 망우동·수색·서강의 세 곳에 연탄제조공장을 지어 연탄 생산 및 공급을 시작하여 1966년 1월에는 회사명칭을 강원산업주식회사로 변경했다.
주요 회사로는 강원산업 외에 제강업인 삼표중공업(三票重工業 1970.7.설립)과 1984년 1월에는 삼표골재사업소를 삼표레미콘으로 개칭하는 등 사업을 확장시켰다. (생략) 관계회사로는 삼표제작소·삼표에너지·삼안레미콘·강원상사·강원아시아·강남도시가스 등이 있었다.(삼표중공업 또는 강원산업주식회사 역사)
그러한 강원탄광은 1993년 폐광을 결정, 당시 지역사회에서는 큰 충격이었다. 세월이 지나 현재 강원탄광의 모습은 삼표제작소(현재 돌구지마을 앞 철길건널목 입구로 지금은 영동선 철교를 위로 통과하는 과선교 공사로 인해 동태백로와 연결되어 있지 않고 끊겨 있다.
그리고 태백시는 철암동과 함께 철암역 전차동마을 인근과 돌구지마을(강원소방학교)을 연결하는 탄탄대로를 조성, 과거 탄광의 흔적과 현재 등산로 및 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2020년부터 철암동건강위원회 주관으로 가을 단풍철에 걷기대회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탄탄대로를 가기 위해서는 철암역 아래 상가남쪽 전차동 입구의 길을 따라 강원소방학교쪽으로 걷다 보면 과거 탄광의 흔적과 함께 소공원, 광산장비, 조형물과 숲길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나팔고개와 비석산
동점 구문소에서 철암으로 들어가는 초입인 나팔고개는 산업전사위령비가 조성돼 있는 비석산이 있다.
나팔고개는 양지말 뒤쪽의 석회암 산등을 끊어 길을 내었는데 바로 이곳을 나팔고개라 했다. 본래의 고개는 현재의 도로보다 50cm정도 동쪽으로 나오면 옛 고개가 있는데 처음 이름을 나붓고개로 낮은 고개를 뜻을 담고 있다. 그리고 혹은 산의 모양이 나팔처럼 생겨서 나팔고개인데 지금의 길이 난 곳은 나팔의 잘록한 목에 해당되는 것이라 한다.
나팔고개 정상에서 동쪽 시내버스 정류장에 서면 정류장 안쪽에 흰두리마을 안내문이 있으며 뒤편으로 산으로 오르기 위한 등산로가 있는데 이곳이 바로 비석산으로 가는 길이다. 비석산 아래는 이곳 주민들의 옛 학창시절을 떠오르게 할 동점초등학교가 있다. 1949년 개교한 동점초등학교는 강원탄광의 흥망성쇠를 보았으며 현재는 병설유치원과 초등학생 18명(2021년 기준)이 재학중이다.
흰두리마을
나팔고개 동쪽하류 일대에 마을이 있는데 바로 이곳이다. 이 하천본류가 이곳 작은 산을 돌아 내려가는 이 일대를 ‘흰두리’라하고, 이곳 작은산을 뒷동산으로 형성된 마을을 ‘동점’이라 하고 동쪽에서 이 하천으로 유입되는 작은 하천 상류지역을 방터골이라고 한다.
흰두리 마을의 역사는 또한 1700년경 이보(1629~1710)가 쓴 황지연못 기행문에서 ‘소야곡을 지나 십여리를 가서 철암촌에 도착했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지금의 흰두리를 소야곡(蘇野谷)이라고 기록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말 중 ‘달’이 첫음절에 오면 ‘높다’는 뜻이고 뒷음절에 오면 ‘산’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임을 감안할 때 이곳 흰두리는 원래, ‘작은산(小達)⇒작은드리(小野)’로 변했다가 작은리의 이두식 표기인 소야의 소(小)자를 ‘소(蘇)’ 또는 ‘흴소(素)’로 일정기간 쓰는 중에 이를 다시 음이 아닌, 훈으로 읽는 까닭에 ‘흰두리’가 되었고 이후 희다는 뜻의 ‘흰두리(素野)’는 다시 휘었다는 뜻의 ‘휜두리(曲野)’로 변천하였다는 것이다.
나팔고개를 따라 비석산으로 향하다
단기 4292년(1959년) 2월24일 강원탄광에 근무하던 민우식(閔于植, 당시 28세)이란 기사(技師)가 갱내에서 사고로 죽었다. 일류대학을 졸업한 그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로 그의 죽음은 가족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보상금 관계로 회사측과 협상하는 과정에서 위령탑을 세워주는 것으로 합의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순직광원위령탑이 세워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순직광원위령탑의 상징인 광원상(鑛員像)이 광부가 아니라는 것이 아ᅟᅵᆯ려졌다. 망치를 들고 서 있는 것은 죽은 민기사의 형상이지만 막장에서 탄을 캐는 광부의 모습은 아니라하여 나머지 순직광부 유족들의 저항이 거세기도 했다.
당초 위령탑을 세울 때 민기사의 위령탑만 세우면 그 전에 죽은 광부들의 유족이 그냥 있지 않을 것이니 내막적으로야 민기사의 위령탑이지만 외형적으로는 강원탄광에서 순직한 모든 광부의 영령을 위로하는 탑으로 세운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된 것은 탑의 꼭대기에 세운 화강암으로 만든 광원상(鑛員像)인 것이다. 망치를 들고 서 있는 석상(石像)의 모습은 탄을 캐는 광부의 모습이 아니라 광부들을 감시하고 일을 시키는 감독이나 육체노동을 하지 않는 기사(技師)의 모습인 것이기에 그러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광부는 죽어서도 기사나 감독의 발 아래 새겨진 이름으로 남아야 되느냐”고 했다.
강원탄광 순직자위령비는 그렇게 해서 1959년 6월 위령제를 올리기 시작해서 폐광이 되던해 1993년까지 위령제를 지내기도 했다,
버스정류장에서 동쪽으로 난 산길을 오르다 보면 멀지 않은 곳에 순직자위령비가 나타난다. 지금은 등산로가 잘 정비돼 있으며 공원 중심부에 서 있는 위령비에는 200여 명의 순직자에 대한 성명, 순직일, 직종, 나이도 함께 기록되어 간략한 생애를 알 수 있다. 강원탄광 순직자 위령비는 우리나라 최초의 순직자 위령탑이라는 점에서 귀중한 유산으로 보존할 필요가 있다.
돌꾸지마을은 강원탄광의 흔적이라도 남아있던 곳이었다. 강원소방학교 부지 일원에는 과거 소방학교가 생기기전 마을의 흔적이 있었다. 기자가 1998년 찾았을 때는 일부 건물도 있었다. 현재는 과선교를 지나 강원도소방학교를 방문하면 옛날의 그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강원탄광 순직자위령비를 통해 강원탄광의 역사와 위치, 과거 석탄증산의 흔적만이라도 후손에 알려줄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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