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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기사

산업전사 특별법 제정위한 제2차 포럼 기고-정연수 탄전문화연구소장 14

광부와 산업전사영웅전 체계적 제작 필요

지난해 본지 태백정선인터넷뉴스의 슬로건은 ‘광부의 희망, 꿈을 찾아서’였으며 (사)석탄산업전사추모 및 성역화추진위원회(위원장 황상덕)의 활동에 따른 기획특집으로 진행했다. 그리고 태백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1차 포럼 가운데 정연수 탄전문화연구소장의 주제발표의 내용 전문을 게재했다.

 

올해 주제는 석탄산업전사들을 위한 특별법 제정 및 예우, 정당한 권리를 찾기 위한 것으로 산업전사들을 위한 문화행사, 석탄산업유적지 발굴, 캠페인 등 구체적인 성과를 낼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했다. 따라서 ‘산업전사의 고향에 빛을’ 이라고 정했다. 그 첫 번째 특집으로 지난해 12월9일 강원랜드에서 열린 특별법 제정위한 2차포럼 ‘산업전사 예우 특별법 이래서 필요하다’ 주제발표 전문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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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산업전사 영웅전 제작

석탄산업과 산업전사 광부가 겪었던 역사적 사실을 다양한 측면에서 규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광부의 생애사를 통해서 구체적인 자료들을 발굴하는 것은 당장 시행해야 할 시급하고도 중요한 과제이다. 또한, 굵직한 탄광사고에 대한 자료적 정리와 의미부여도 진행해야 한다.

 

2004년 삼청교육대 특별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삼청교육대 피해자 전국연합회’는 미진한 부분이 많다면서 개정 요구 작업을 지속하여 전개했다. 2021년 7월에는 ‘삼청 진상규명 및 배보상 특별법 개정’을 촉구하는 성명서와 집회를 가졌다. 국가를 대상으로 하는 특별법 제정과 피해보상 투쟁은 긴 시간을 두고 진행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삼청교육대 특별법이 제정되기 전의 자료집은 작은 책자 분량이지만 피해자 2명의 증언을 함께 수록했다. 기조발표와 토론보다 피해자 증언이 더 감동적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삼청교육대 특별법 제정의 필요성에 대한 설득의 힘도 지니기도 했다.

 

산업전사 역시 국가의 석탄산업 기획에 의한 피해자이자, 국가 산업에 기여한 영웅이다. 피해자의 증언이 곧 영웅을 입증하는 것이므로 다양한 측면에서 광부의 생애를 수집하고 체계화해야 한다. 2021년 11월에는 광산진폐권익연대 삼척지회 사무실에서 선탄부의 생애담을 기술하는 중에 지회장이 가로막아 면담을 무산시킨 사례도 있다. “아픈 상처를 왜 들춰서 사모님을 힘들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이처럼 외부인이 광부들을 만나 구술작업에서 나서면서 겪는 고충이 많아서 탄광자료 축적은 더 힘들기도 하다. 그 때문에 구술작업을 포기하는 연구자들도 있다.


이제는 탄광촌의 대표적 광부 단체인 진폐재해자 6개 단체가 앞장서서 광부의 생애사 기술을 통해 구체적인 자료를 만들어주기를 주문한다. 광부가 겪은 상처의 기술은 산업전사에게 노동을 강요한 국가의 폭력을 입증하는 자료가 될 것이며, 산업전사의 영웅적 행위를 입증하는 자료가 될 것이다. 또 글쓰기치료나 문학치료의 사례에서 보듯, 삶을 풀어놓고 글로 다스리는 과정에서 삶의 치유 효과를 얻을 때도 있을 것이다. 자료 발굴과 더불어 산업전사의 의미를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광부영웅전을 체계적으로 제작할 필요가 있다. 광부영웅전, 산업전사 영웅전을 만들자.

 

(1) 선탄부 영웅 김매화전(傳) 김매화, 81세, 도계읍 전두리

김매화 씨의 호적은 1940년생이나 실제는 1938년생이다. 1975년에 도계광업소에 입사하여 개발항 선탄과에서 3년, 점리갱 선탄부 3년, 흥전갱 선탄과 1년, 도계갱 선탄과 13년 등 두루 거치면서 총 20년을 근무했다. 55세 정년퇴직 때까지 선탄부 생활을 했다. 김매화 씨가 선탄부가 된 것은 삭도에서 남편이 추락하면서 시작했다.

 

김매화 씨를 만나면서 일제강점기에 제국주의에 저항하던 투사이자 저항시인이던 이육사가 떠올랐다. 김매화 씨의 삶은 우리의 산업시대가 지닌 모순과 부조리에 저항하는 영웅적 삶이었기 때문이다. 도계에서는 탄광촌 정체성을 반영한 마을 프로젝트로 ‘삭도마을’을 만들었는데, 김매화 씨의 삶을 삭도마을이 기억하길 기대해본다.

 

(2) 한국의 마지막 민영탄광인 경동탄광의 창업자 채기엽과 채현국

도계광업소의 전설적인 광업계의 인물로 대동공전을 설립하여 광산기술자를 양성한 이종만을 꼽는다면, 흥국탄광(경동탄광의 전신)의 전설적인 인물로는 채기엽과 채현국 부자를 꼽을 수 있다.

 

‘흥국탄광’의 이름이 지닌 유래를 알 수 있다. 그동안 필자는 사북 탄광촌을 조사하는 과정에서도 등장하고, 도계탄광촌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흥국탄광’이란 이름을 퍽 좋아했다. 그 이름의 의미는 나라가 흥하기를 바라는 의미라든가, 석탄을 통해 나라를 흥성하겠다는 석탄산업의 의미를 잘 담았다고 보아서다. 그런데 『쓴맛이 사는 맛』을 통해 흥국의 유래를 접하고는 적잖이 실망했다. ‘석탄이라는 구국의 에너지, 석탄산업을 통해 일으키는 한국산업’의 명분을 함께 가졌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여겼다. 흥국의 뜻이 고작 ‘흥해라 현국아, 죽지 말고 살아있어라 현국아’에 머문다고 생각하니 아쉬움이 크다.

 

그래설까, “개인소득세 납부액이 전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거부 소리를 듣기도 했다”라거나, “사세에 힘입어 고작 30대의 나이에 석탄산업협동조합 이사장을 지냈다. 당시 나는 벤츠를 타고 종로1가 신신백화점 자리에 있던 중소기업중앙회에 가끔씩 친구인 여상빈을 만나러 갔다”라는 대목이 거슬렸다. 소득세 납부액 전국 열 손가락의 의미는 큰 수입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당시 흥국탄광 광부들의 처지는 어떠한가? 흥국탄광은 여전히 바로 옆에 소재한 대한석탄공사 도계광업소 직원들이 받은 처우만도 못했다. 모두가 흥국탄광보다 도계광업소에 입사하려고 하는 상황만 보더라도 무엇을 의미하는지 유추할 수 있다.

 

탄광이 전성기였을 때, ‘강아지도 만 원짜리 물고 다녔다’는 말은 탄광경영주나 매탄업자를 비롯한 감독관청 일부에 국한될 이야기였다. 채현국의 표현대로 “고작 30대의 나이”에도 “벤츠를 타고 종로1가 신신백화점 자리에 있던” 친구를 만나러 갈 수 있는 것은 막장의 노보리를 오르던 광부들이 아니라 탄광 사장 1명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탄광경영주에게서 대접받으며 노동자의 열악한 상황에 대하여 침묵하던 권력의 카르텔뿐이었다.

 

1970년대 탄광경영주가 30대의 나이에 벤츠를 탈 때, 작고 낡은 승용차라도 가진 광부는 1970년대에 단 1명도 없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흥국탄광의 광부들은 여전히 가난했고, 거주하는 사택은 여전히 초라했으며, 흥국탄광 광부 중에서는 사택을 얻지 못한 광부도 여전히 많았다. 탄광의 번성이나 사주의 수익이 많아지는 것과 그곳에서 목숨 바쳐 일하는 노동자의 번성과는 별개의 일이었다. 위의 글을 읽으면서 ‘흥국’이란 이름의 유래가 지닌 것보다 더 아쉬운 일이 있다.

 

흥국탄광은 나중에 이름을 바꿔 지금 도계읍의 마지막 민영탄광인 ㈜경동 상덕광업소로 2021년 12월 현재도 운영 중이다. 이렇게 오래 운영하면서 성공한 광업소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도계읍은 여전히 초라하다. 지역의 기업이 성장해도 지역 자체는 성장하지 않는 모순을 위의 글이 보여주고 있다. “탄광에서 한밑천을 잡은 아버지”였으나 그 밑천은 다른 지역에다 기업을 투자하거나 다른 지역에서 학교 법인을 키웠기 때문이다. 흥국탄광을 비롯하여 도계지역의 탄광이 흥성하고, 탄광경영주가 한밑천을 잡을 때도 도계지역에는 재투자하지 않았다. 그저 도계지역의 산을 뚫고 석탄을 채굴하여 ‘한밑천’을 꺼내 가기에 바빴던 것이다. 도계에서 얻은 수익이라면, 그곳에서 일하던 노동자에게, 그 지역을 내어준 도계지역에 환원할 수 있는 상생구조여야 했다.

 

아직 늦지 않았다. 채기엽과 채현국은 세상을 떠났어도, 흥국탄광은 경동 상덕광업소로 이름을 바꿨어도 그 탄광시설은 아직 고스란히 남아있다. 흥국탄광(경동광업소)이 도계지역에서 수익을 올리고도 도계의 산업 재생산에 기여를 하지 못한 일을 바로잡을 방법이 있다. 당장은 이 탄광 시설의 현황을 지역에 공개하여 가치있는 시설은 근대산업문화유산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하는 일이며, 앞으로는 이 시설물 자체를 온전히 보전하는 방안을 세워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석탄합리화 정책을 시행하던 1989년부터 32년이 지난 지금까지 다른 탄광이 그래왔듯, 가볍게 손을 털 듯 떠나서는 안 될 일이다. 탄광피해복구는 산림과 수질의 피해복구 만이 아니라 그곳에 사는 주민의 삶과 지역에 대한 피해복구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 산림이나 수질만큼이나 소중한 것이 사람의 삶이 아니던가!

 

정선군에는 두 개의 산업전사 위령비가 있다. 사북뿌리공원과 신동읍에 각각 설치되어 있다. 이 중 2016년 10월31일 준공한 함백탄광 기념공원은 순직자 명단이 적힌 위령비를 향해 거수경례하는 조각상이 마주 보도록 입체감 있게 조성한 특성도 다른 지역의 산업전사 위령비와 차이를 보인다.

 

전국 탄광지역마다 순직자위령비가 있지만, 함백탄광기념공원의 순직자위령비가 의미를 지니는 것은 자미갱 화약폭발 사고현장에 세웠다는 점이다. 당시 폭발사고는 자미갱 입구로부터 10m 지점에서 광차에 싣고 가던 폭약이 폭발하면서 28명이 순직했다. 위령비에는 1979년 4월의 화약폭발 사고로 순직한 광부 외에도 1993년 함백광업소가 폐광하기까지 순직한 163명의 이름을 함께 기록하고 있다. 정선군에서는 태백에 있는 위패까지 모셔오려고 했으나, 유족의 이동 편의를 고려하여 태백에 두는 것으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탄광에는 숱한 목숨과 유가족의 한이 배어있다. 탄광사고를 도표 안에 넣어두고, 한 해 200명 순직이라는 숫자 안에 가둘 일이 아니다. 함백광업소 자미갱의 화약폭발 사고현장에 기념비를 세우고, 그 이름을 새기듯 순직한 산업전사 한 사람 한 사람씩 그의 생애를 기려야 한다. 우리 손으로 광부의 삶을, 고통을, 순직의 아픔을 직접 기술해야 한다. 우리 손으로 한국산업사에서 한국노동사에 석탄산업이 차지한 과정을, 그 산업을 위해 희생한 산업전사 광부의 노고를 기술해야 한다.

 

1970년 12월10일 오전 5시경, 강원도 삼척군 도계읍 소재 흥국탄광에서 광부 26명이 매몰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 발생 당일자 《동아일보》(당시는 석간)에 그날의 상황이 보도되었다. 갱구에서 960미터 되는 지점의 석회암으로 된 갱벽이 갑자기 무너지자 석회암 동공에 고여 있던 자연수가 쏟아져 내리면서 갱내의 석탄과 흙이 뒤범벅돼 갱도 30미터를 메워버렸다. 이로 인해 갱도 안에서 채탄을 하던 광부 26명이 매몰됐다. 현장에서 광부 1명이 사망했고 25명에 대한 구조작업이 진행됐다. 사고현장에는 손달용 강원도경국장이 나와 구조작업을 지휘하였다. 오후 3시경 직경 3인치짜리 에어파이프를 갱 속에 연결하여 산소를 공급했으나 광부들과는 통화가 안 되는 상황이었다. 탄광사고는 이전에도 빈발했다. 흥국탄광은 물론 다른 탄광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날의 사고는 그중에서도 대형 사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