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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뉴스가 만난 사람

35 정연수 탄전문화연구소장 “산업전사 그들에 대한 예우는 당연하다”

아이뉴스, 태백정선인터넷뉴스가 진작에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난 듯 하다. 본지(本紙)가 지난 2019년 특별기획으로 마련한 ‘폐광지역의 힘 산업전사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슬로건으로 특집기사를 보도했었다. 그리고 태백과 정선에서는 석탄산업전사들에 대한 예우와 국가적인 지원방안, 성지화 사업들이 추진됐고, 이듬해 태백시청 시장실에서 첫 미팅을 가졌고, 간담회와 발기인대회를 거쳐 (사)석탄산업전사 추모 및 성역화추진위원회가 구성, 본격 가동하기에 이르렀다.

 

뒤이어 성역화사업을 국가적 차원의 추진과 산업전사위령제의 국가주도 행사화를 주목적으로 내걸었고 포럼을 준비하기에 이른다. 포럼에서는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원동력이었으며 에너지 자원을 지하 막장에서 캐내던 석탄광부와 가족, 그리고 순직자와 병상에서 죽음과 싸우고 있는 진폐환자들에게 국가적 차원의 예우는 당연한 것인만큼 이에 대한 당위성을 전국에 알리기에 나섰다. 그리고 그 중심에 정연수 탄전문화연구소장이 있었다. 2021년 10월1일 태백문화예술회관에서 첫 번째 포럼을 개최하기에 이른다. 정연수 소장은 지난 11월8일 국회에서의 4차 포럼 가운데 2차례 포럼에서 주제발표를 했으며 4차례의 포럼 모두 참석해 토론자로 나섰다.

 

정연수 소장을 아이뉴스가 만난 사람으로 초대한 이유는 이러하다.

2022년 12월8일이 바로 이철규 국회의원의 대표발의로 ‘순직 석탄산업전사 예우를 위한 국가적 차원의 지원’을 담은 ‘폐광지역 개발 지원에 관한 특별법 일부개정법률안’ 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날이며 이를 기념하고 폐광지역 7개시군 지역주민들에 대한 희망을 주고 “왜 우리는 순직 석탄산업전사를 예우하고 그 뜻을 기려야 하는가”에 대한 울림을 되새기고자 함이다.

 

정연수 소장은 태백출신이다. 문학박사이면서 현재 강릉원주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그는 지난 1991년 탄전문화연구소를 설립해 탄광이 빚은 삶들을 문화영역으로 끌어올린데 이어 지난 2020년에는 강원도 석탄산업유산 유네스코 등재추진위원회를 설립해 활동 중이다.

 

기자가 정 소장을 처음 만난 것은 1998년 이었다. 태백에서의 그와의 만남은 탄전문학으로 태백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었고 예술문화단체 사무국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기자도 그때부터 폐광지역의 문화, 탄광문화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해 많은 자료들을 찾아보았고 전국에서도 유일한 탄광문화를 만들어보자는데 공감했으며 그 뿌리가 오늘에 있게 했다.

 

그리고 2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태백에서 그를 다시 만났을 때 옛날의 그 모습을 그대로 탄광문화를 사랑했고, (사)석탄산업전사 추모 및 성역화추진위원회(위원장 황상덕)에서 포럼의 기조발제 및 그 당위성에 대해 설명해주셨으면 좋겠다는 정중한 제안을 했으며 그는 이를 받아들였고 열심히 준비해 2차에 걸쳐 발표했다. 포럼에서 정연수 소장의 발표내용을 들어보았을 때 “1~2년 만에 준비한 것이 아니구나”라는 공감을 얻었다. 본지는 정연수 소장이 밝히는 “석탄산업전사 그들에 대한 예우는 당연하다”라는 주제로 독자 여러분들에게 전해주려 한다.

 

‘석탄산업전사’ 80년의 시간

1차 포럼 발제에서 산업전사에 대해 설명했다

‘산업전사’라는 호칭은 그 자체로 이미 서러운 이름이라고 정 소장은 밝힌다. 노동자에게 목숨을 담보로 노동을 강요하는 호칭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그 이름의 유래에는 일본제국의 식민지 생활을 겪은 조선인의 서러움이 배어있어 더욱 서러운 이름이다. ‘산업전사’는 아시아-태평양전쟁기 총동원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생성된 호칭‘ 으로 일본제국이 노동자의 동원을 위해 끌어들인 전사(戰士)의 개념에서 비롯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정 소장은 1939년 9월30일 매일신보의 보도내용과 이병례, 「아시아-태평양전쟁기 ‘산업전사’이념의 형상화와 재현」, 『사총』94호,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2018, p.33)를 통해 분명해졌다고 했다. 이때 국가권력은 언론을 통해 ‘산업전사 총동원할 국민징용령 발동’ 으로 전쟁터로 출정하는 군인과 노동자를 동일한 전사로 명명했다. 국가권력이 나서서 노동자를 ‘산업전사’라고 공식화한 것이라고 정 소장은 전한다.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광부들 자신이 ‘산업전사’라는 말을 쓰지 않은 것은 물론이려니와 국가가 나서서 이들에게 ‘산업전사’라는 계급을 만들어주고 탄광의 막장으로 내몰았으니 말이다.

 

정 소장은 “산업전사라는 호칭은 국가권력이 노동자를 전시의 군인과 같은 긴장으로 몰아넣으면서 맹목적인 애국을 내세워 희생을 강요하는 기계로 작동했다. 전투군단과 같은 군대식 규율이 탄광의 광부에게 요구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광부에게는 인권이 없었고, 생산하는 기계로 작동하는 전사의 임무가 주어졌다. 생산량이 부족할 때는 얼차려와 같은 군대식 기합과 뺨 때리기, 조인트 까기, 타코망치로 광부의 머리를 때리는 관리자 등의 구타도 일상적으로 자행되었다. 대부분의 역대 석탄공사 사장이 군출신이라는 것은 이를 확인하는 것”이라고 했다. 1차 포럼에서의 발표내용이다.

 

이러한 일도 있었다고 했다.

1955년 2월, 이승만 대통령은 석탄증산과 탄광노동자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19명의 모범 산업전사를 경무대(현 청와대)로 초청하여 위로 행사를 열었다. 광부들이 묵는 숙소에는 ‘탄광 모범 산업전사 환영’이라는 현수막까지 붙었다. 1956년 대한석탄공사에서 열린 제2회 모범 산업전사 표창식은 “각지 탄광에서 우수한 채탄 업적을 올린 20여 명의 모범 산업전사에게 표창한다”(「대한뉴스」 제74호)는 영상뉴스를 제작하여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리고 모범산업전사 청와대 초청, 대통령 직접 치하, 모범산업전사 돌사택을 제공했다. 정부는 1955년에 모범 산업전사를 선정하면서 이들에게 돌로 지어진 특별사택이 제공됐다. 태백과 삼척 등 전국적으로 총 19채가 건립되었는데 나무 사택이 주류를 이루던 시절에 단단한 돌로 건립된 돌사택은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태백시 금천동에 소재한 모범전사 돌사택의 흔적은 2021년 현재도 일부 남아 있다고 정 소장은 설명한다.

 

정부가 광부의 호칭을 통해서 석탄생산량에 몰두하고 있었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 70년대 광산사고가 끊임없이 일어나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1975년 황지(태백시)로 직접 내려와 순직 광부를 추모하기 위해 ‘산업전사 위령탑’을 건립을 지시했고 친필 휘호를 남겼다. 현재 석탄산업전사위령탑의 비문인 것이다. 이것 역시 애국과 석탄생산을 지속적으로 연결 짓는 행위이다. 위령탑의 비문에는 “400개 광산 5만 명을 헤아리는 종업원들은 영광된 사명을 어깨에 메고 있는 고귀한 산업전사들”(1975년 11월 25일)이라는 문구를 담고 있다.

 

정 소장은 따라서 국가권력이 석탄생산과 노동력을 통제하기 위해 광부에게 부여한 의도된 행위라는 점에서 ‘산업전사’의 이름으로 희생당한 광부의 한은 국가가 나서서 풀어야 마땅하다. 국가권력이 주입한 ‘산업전사’ 의식화에 의해 희생한 광부에 대한 보상은 순직산업전사를 비롯한 산업전사였던 광부 전체를 위한 성역화 공간 조성에서 출발할 수 있다. 하여, 성역화 공간에 포함하는 대상을 설정할 때는 모든 석탄산업전사를 아우를 수 있어야 한다. 광부의 존재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따지기 전에 이미 산업전사였기 때문이다. 모든 광부를 산업전사로 칭하며 의식화하거나 예우했듯, 석탄합리화로 산업이 마무리된 이 시점에서는 역사적이고 교육적인 공간이 가능한 성역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석탄광산과 광산사고는 50~60대 아재들이 어렸을 적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해 자주 접하는 사고소식이었다. 석탄광의 환경이 얼마나 열악하였는지 이를 증명한다.

 

정 소장은 “광부들이 자조하듯 내뱉는 ‘막장 인생’이라는 말 역시 노동 현실을 반영한다. ‘막장’이라는 용어는 광부의 작업 현장이란 의미 외에도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채굴하는 열악한 작업환경을 내포하고 있다”고 했다.

1970년대는 1년에 평균 200명의 광부가 목숨을 잃는 탄광막장이었다. 갱내에서 사고가 발생하면 같은 막장에서 일하던 광부들이 동시에 생명을 잃기 때문에 ‘한 막장은 한 제삿날’이라고 불렀다.

 

사망사고 비중이 가장 컸던 때는 1973년이며 탄광노동자 34,573명에 229명이 사망했다. 경상을 포함하여 재해자 수가 가장 많았던 때는 1967년의 6,774명이다. 탄광 숫자도 제일 많고 광부 수도 제일 많은 1987년에는 탄광 363개소에 68,491명이 종사하고 있었으며 사망자는 174명이다.이는 통계로도 증명이 됐다.

 

성희직 정선진폐상담소장의 글도 덧붙인다.

탄광사고는 공식집계로 되지 않은 것을 포함하면 그 이상의 광부들이 숨졌을 것으로 파악되며 광업공단이나 노동조합에서도 그 기록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한다. 또한 태백시 고한사북 도계읍 등 폐광지역은 석탄산업전성기인 1970년대엔 매년 200명에서 250명의 광부들이 탄광사고로 숨졌고 중경상자들도 4~5천 명이나 발생했다. “이게 전쟁터지 어찌 일터라고 할 수 있나? 그러한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사람들도 상당수가 진폐증이란 불치병에 걸려 힘겨운 노년을 살고 있다”고 전한다.

 

정 소장은 우리나라 직종 중에서 광부만큼 별명을 많이 가진 직업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에 선택하는 기피직종이었으나, 경제적 소외층이 애국하는 마음으로 고향을 등지고 탄광촌으로 들어온 광부들이었다. 3년만, 5년만 열심히 일해서 돈 벌어 떠나겠다는 마음으로 들어왔다가 영영 못 떠난 광부들이기도 했다고 전한다.

 

더욱이 광부들은 자신의 자식만큼은 광부로 만들지 않겠다는 의욕을 품기도 했지만, 탄광노동력 확보에 혈안이 된 국가의 기획에 의해 그 꿈은 무산되었다. 석탄증산이 시급한 국가와 기업은 당근(야간 통행 금지 예외, 예비군 면제)과 채찍(막장교대, 고속굴진, 생산 목표량 달성)으로 광부들을 몰아세웠다고 정 소장은 전한다.

 

그리고 부족한 노동력 확보를 위해 사택 제공, 군 면제, 학자금 지급, 인력 소개 수당 지급 등의 유인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대도시로부터의 노동력 유인책 외에도 국가가 나서서 광부의 아들을 광부로 육성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그 광부가 사망하거나 부족한 노동력은 아내에게도 되물림 되기도 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탄광촌 지역마다 공업계 고등학교를 신설하고, 공고 육성 방안을 통해 탄광 기능인을 육성하고 나섰다. 태백의 태백공고, 삼척의 삼척공고와 도계실업고, 영월의 영월공고, 정선의 함백공고 등에 광산과를 신설하여 인력 수급을 담당했다. 강원도 내 대표적인 탄광촌마다 공업고등학교를 설립하고 광산과를 개설하면서 광부의 자녀가 자연스럽게 광부가 되는 길을 열었다.

 

그리고 1970년대 정부와 언론이 사용하던 ‘광공업 발전’이란 용어에서도 알 수 있듯, 탄광업은 모든 공업의 선두에 있었다. 석탄에너지 없이 공업발전이 불가능한 시대적 배경을 증거하는 것이기도 하다. 산업전사의 자부심은 맹목적이거나 추상적인 것만이 아니라, 국가의 광공업 발전에 기여한다는 구체적인 실체였다.

 

탄광에서 5년간 재직하고 군면제를 받는 병역특례 정책 역시 젊은 노동력의 유인책이었다. 병역특례 시책은 숙련공을 탄광에 오래도록 붙잡아두는 효과를 거두었다.

 

석탄증산으로 인한 전문부처도 만들어졌다. 정부는 국내 에너지의 공급과 수요를 총괄하고 자원외교를 담당할 독립부처의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1977년 12월16일 동력자원부가 신설되었으며 1993년 상공부와 통합되어 상공자원부로 개편되면서 폐지된바 있다. 지금의 산업자원부(산자부)이기도 하다.

 

탄광에서 5년간 재직하고 군면제를 받는 병역특례 정책 역시 젊은 노동력의 유인책이었다. 병역특례 시책은 숙련공을 탄광에 오래도록 붙잡아두는 효과를 거두었다. 산업화가 급속히 이뤄지는 시기에 탄광업체에서 5년 동안 근무를 하고 나면 다른 산업체로 옮겨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가 교육제도를 통해 광부를 양성하고, 국가가 나서서 ‘조국 근대화의 기수-산업전사-증산보국-광공업 발전’ 등의 이데올로기를 광부에게 내면화시켰다.

 

정부가 이처럼 산업전사들을 앞장세워 석탄증산에 내몰았던 것은 일제강점기의 광산노동자에 대한 대우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죄수노동에서 시작한 일제의 탄광노동은 “노동자에 대한 가혹한 착취와 노무관리제도는 아시아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이후에 더욱 강화” 되면서 식민지 공간의 노동제도 역시 그대로 답습했다. “일본 탄광으로 징용된 뒤 감시를 받는” 광부는 식민지 시기 3개 민족(조선인·일본인·중국인)이 섞여서 탄광촌을 형성한 강원지역 공간과 일본까지 이동하는 강제 이주 현실을 반영한다. 탄광촌은 제국주의적 야만 속에 계급화·인종화가 이뤄진 공간이었다. 1935년 영월탄광이 개광하면서 북면 마차리에 강원도 내에서 가장 먼저 탄광촌이 형성됐다. 한국전쟁당시 북한에 에너지자원이 많았던 까닭에 정부는 전쟁중에도 광부들을 광산으로 투입시키기도 했다.

 

정부는 그러고도 광부가 필요 없어진 1989년, 예고도 없이 석탄합리화를 시행하면서 광부들을 실직으로 내몰았다. 산업전사라고 추켜세우던 광부를 폐광정책 속에 폐기처분한 주체가 국가였으니, 전사에 대한 예우와 보상은 마땅히 국가가 책임져야 할 일이다. 이는 정연수 소장의 주제발표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탄광업계와 탄광지역 행정도 모르게 서둘러 실시한 폐광 정책

1981년 탄광촌이던 장성·황지·철암을 태백시로 승격시킨 것은 석탄산업도시의 기능 활성화, 탄광촌 주민의 위상제고, 석탄증산 독려 등을 위한 국가의 기획이었다. ‘광도(鑛都) 태백’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태백시는 석탄합리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폐광으로 몰락할 줄을 상상을 못 했다.

 

1986년 태백시의 시정목표는 “화합, 질서, 성실/우리는 산업역군 보람에 산다”였으며, 시정방향 4개 항 중에서 1개 항목을 “광산근로자의 생활복지 향상” 으로 제시할 정도로 광부의 삶을 중심에 두었다. 대규모 폐광이 이뤄지는 1989년 석탄합리화 정책이 시행되고도 2년이 지난 1991년의 <시민헌장>도 그 이전과 변함없이 ‘산업역군’을 중심에 놓았다. 시정목표에서는 ‘산업역군’을 삭제했으나 시정방향 5개 항목 중에서 1개 항목은 여전히 “광산마을 잘살기 운동” 이라면서 탄광촌의 정체성을 반영하고 있다. 이처럼 태백시는 시행정 자체에서도 탄광도시로 발전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고, 외부에서도 태백시는 한국 석탄산업의 메카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탄광의 문을 닫는 석탄산업합리화는 1989년 갑작스럽게 시행되었다. 탄광도시인 태백시도 몰랐고, 석탄을 생산하는 탄광업계도 몰랐고, 탄광지역의 교육행정도 몰랐다. 아무도 몰랐다. 광부들이 입주할 사택이 모자라서 이름을 아예 ‘광부아파트’라고 지은 사택을 건립했는데, 그 사택이 건립되던 때에 석탄합리화가 시행된 것도 갑작스런 정부정책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문곡동의 광부아파트, 소도동의 광부아파는 결국 민간인에게 불하되었다.

 

석탄합리화와 가장 밀접한 탄광업계 역시 그 시기를 감쪽같이 몰랐다. 태백역 옆에 대규모 저탄장을 건설하던 중이었는데, 석탄합리화로 쓸모가 없어지면서 다시 복구하는데 만도 막대한 예산을 들여야했다. 수갱을 건설해놓고 문을 닫은 사례는 탄광업계가 석탄합리화 시행을 몰랐다는 것을 증거한다.

 

정 소장은 사례를 들며, 사북광업소는 1982년에 수갱을 착공하여 영구철탑은 1983년 준공하였으며, 전체 시설 완공은 1988년 12월 이뤄졌다. 해발 650m 지점에서 해저 115m까지 총 길이 765m의 수갱을 완성하면서 심부화 채탄의 길을 열었다고 환호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완공한 그다음 해인 1989년, 정부에서는 석탄산업합리화 정책 시행에 들어갔다.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 그 다음은?

정연수 소장은 먼저, 정부의 폐특법 개정안으로 인한 예우의 시작과 함께 우리 폐광지역도 준비할 것이 있다고 했다.

첫번째, 2021년 흥국탄광 경영주 채현덕이 세상을 떠난 것처럼, 노쇠한 광부들이 점점 세상을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떠난 광부를 추모하고 그리워할 수는 있어도 그의 생애를 호명하며 대화할 수는 없다. ‘산업전사 영웅전’편찬 사업을 산업전사 예우를 위한 주요 사업으로 추진할 것을 제안했다. 순직자 발굴사업과 함께 말이다.

 

그리고 두 번째 석탄산업유산이다.

석탄산업 유산과 관련한 지역의 시설물 중에서 문화재청에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유산이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태백의 철암역두 선탄시설과 장성 이중교, 삼척의 도계역 급수탑이 있다. 이는 석탄산업의 유산이 문화재로 기릴 가치가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고, 더 의미 있는 가치 부여를 통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정선과 영월 문경과 보령 화순에도 석탄관련 시설물들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문화유산들을 지원버리기에 앞서 보존하는 정책으로 돌아서야 한다. 도시재생은 지역의 가치를 찾고, 지역의 유산을 배경으로 삼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탄광 문화와 관련한 아카이브 구축이 필요하다. 사북지역에서는 2019년에 외부용역을 통해 아카이브 구축 사업을 시작했다. 2021년에는 태백과 삼척에서도 기초적인 아카이브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아직 미지한 작업이 많은 만큼 지역주민들이 소장하고 있는 각종 석탄산업 유산 자료의 목록화가 필요하다. 흩어져 있는 것을 한곳에 모으는 것은 힘들지만, 목록화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도계읍의 흥전지구(중앙갱)를 비롯하여 태백 장성의 장성광업소(머잖아 폐광할 것이므로), 정선 사북의 동원탄좌 현장을 묶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자는 것이다.

 

세 번째가 바로 탄광민속문화 유산의 계승발전이다.

정연수 소장은 탄광문화 계승을 위해 ‘동발조립 민속 경연대회’를 추진하는 등 탄광의 무형문화 유산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했다. 2019년 11월 29일 휘닉스 평창호텔에서 개최된 제2회 강원학 대회의 ‘강원도 무형문화유산의 세계화’ 토론에서 필자는 두 가지 제안을 했었다. 첫 번째가 동발 조립 경연 대회를 계승 발전시켜 강원도무형문화재로 지정하는 것이다. 석탄산업전사 성역화 사업과 탄광민속 복원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아울러 지역에서 7개 탄광촌과 연대한 탄광지역학술 세미나를 비롯하여 아시아 민속학회 및 강원학센터와 연계한 강원지역 학술대회 개최 등도 고려할 수 있다. 강원도 탄광촌의 자료 중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이 일제강점기의 자료와 이 시기의 석탄산업 약탈 부분인데, 구술을 통해서라도 자료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 탄광문화를 발전시킬 매개체가 바로 광부의 날 지정으로 해마다 학술행사 및 세미나 자료발굴 토론회가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네 번째가 공공기관의 직제조정 및 정책마련이다

정 소장은 장기적 활동을 위해서는 산업전사의 역할을 규명하는 연구소 개설과 전문연구위원 위촉에 나서야 한다. 이를 통해 일회성 포럼이 아닌 지속적인 사업을 시행해야 한다고 했다.

 

자료를 조사하고, 아이디어를 모으고, 사업 방향을 기획하고 재조정하면서 역량을 축적해야 한다. 이러한 사업이 원활하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산업전사 성역화추진위’와 ‘태백현안대책위’라는 민간기구 외에도 태백시의 공적 직제가 편성되어 함께 호흡해야 한다. 특별법이 개정된 만큼 태백시도 직제 조정을 통해 활발히 나선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태백시는 산업전사 예우 특별법 제정을 ‘위령탑과 위령각의 공간 확대와 순직 광부 추모 사업’ 정도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 장성광업소 폐광 이후에 전개될 ‘탄광문화유산을 활용한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통하여 새로운 도약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라도 시 직제 내에 탄광문화유산과를 신설하여 민간기구와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정 소장은 아울러 석탄공사를 광해광업공단에 편입하여 해체하는 수순으로 갈 것이 아니라, 탄광촌의 특수성을 고려한 새로운 방식의 대안이 필요하다. 그동안 광해공단은 카지노 수익금을 통해 폐광지역 7개 시군에 ‘적선하듯 퍼주는’ 지원형태에 불과했다. 폐광촌의 대체산업이라고는 카지노 외에는 변변하게 성공한 것도 없고, 실직광부와 폐광촌 주민들의 삶은 나아진 것이 없었다. 따라서 석탄공사의 진로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행정기관이 통합하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예컨대, ‘탄광문화유산공사’ 같은 체제로 독립하여 석탄공사가 남긴 시설을 산업유산의 세계자원화 방안으로 추진하는 방안이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의 한국관광공사 외에도 경상북도문화관광공사, 경기관광공사, 제주관광공사 등이 관광 중심으로 지역문화와 결합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 소장의 맺음말이다.

지난 11월8일 서울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석탄산업 재평가와 가치화를 위한 입법토론회’에서 그는 태백과 정선, 도계 등 각 지역에 산재해 있는 탄광과 그 흔적들을 보존함과 동시에 국가등록문화재로의 지정방식을 따라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를 위해서는 지자체가 앞장서야 하며 강원도 역시 적극 나서고 있는 만큼 이를 동시에 국립 탄광박물관 형태로 추진해 놓은 이후 유네스크 지정문화재로의 길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민간단체의 적극적인 활동과 문화유산보존, 기관의 직제추진과 전문사업, 폐광지역 지자체의 공조, 강원도의 노력이 앞쳐질 때 우리나라 탄광의 문화는 영구히 보존될 것으로 보이며 유네스코 지정 및 우리의 아버지들에 대한 진정한 예우는 빛을 보게 될 것으로 확신한다.